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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이슈] 정치 퍼포먼스 3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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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3막

3일 오전 11시20분 여의도 국회 기자회견장. 한나라당 박진 의원이 오른손에 망치를 들고 나타났다. 왼손에는 양주잔이 안에 담긴 맥주잔, 이른바 '폭탄주'잔이 들려 있었다. 그는 "최연희 전 사무총장 사건은 폭탄주를 돌리고 거나하게 취한 상태에서 발생했다"며 "한나라당은 지도부부터 폭탄주를 끊어야 한다"고 외쳤다. 그리곤 망치를 쳐들어 폭탄주 잔을 내리쳤다. 컵이 산산조각나며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박진 기획.연출'의 폭탄주 잔 깨트리기 퍼포먼스였다. 폭소클럽(폭탄주 소탕 모임) 회장인 박 의원은 5.31 지방선거의 서울시장 당내 경선에 출마 선언을 한 상태다.

#2막2일 오후. 의원총회를 마친 한나라당에선 "분위기 쇄신을 위해 해병대에 입소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최 의원의 여기자 성 추행사건으로 악화한 여론을 반전시키자며 안경률.정두언 의원이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루 뒤 이 계획은 흐지부지됐다. "나이 60 넘은 노인들이 쓰러지면 누가 책임질 거냐"며 중진의원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의원 126명 중 60세 이상은 39명.

그럼에도 한나라당 안에선 이벤트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가뜩이나 열린우리당과의 지지율 격차가 좁아지던 터에 초대형 악재가 터지자 고육지책이 속출하고 있다. 당 여의도연구소의 1일 전화조사에선 지지율이 1주일 전보다 2%포인트 하락한 것으로 나왔다. 특히 여성의 당 지지율은 5%포인트나 추락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외침도 들린다. 이해찬 국무총리의 '3.1절 골프'에 대해 공격의 고삐를 바짝 죄고 있다. 이계진 대변인은 3일에도 "대통령이 3.1절 기념식에서 만세삼창을 외칠 때 총리는 '굿 샷, 나이스 샷, 오케이 삼창'을 외치고 있었다"고 비난했다.

초조하기는 여당도 마찬가지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나라당과의 지지율 격차를 5%포인트까지 좁혀보겠다는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희망은 일부 의원의 계속된 헛발질로 무산될 위기다. 2일 정청래 의원은 최 의원의 성추행 장면을 손짓으로 묘사하는 장면을 연출해 "제2의 성추행"이라는 역공에 휘말렸다. 같은 날 한광원 의원은 홈페이지에 '꽃 보면 만지고 싶은 게 순리'라는 글을 올렸다가 네티즌들의 융단 폭격을 당했다.

지난달 24일 한나라당 지도부와 동아일보 간부.기자들의 회식 자리에서 일어난 성추행 사건은 여의도의 프리즘을 거치며 이상하게 굴절하고 있다. 공격이 반격을 낳고 다시 재반격하는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성추행'이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르자 이를 정치상품화하려는 의도도 엿보이고 있다. 석 달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 승기를 잡기 위한 정치적 계산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기획.연출에 참여하고 국무총리까지 조연으로 출연한 여의도 정치 쇼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1막 최 의원 여기자 성추행 사건은 발생 초기만 해도 이성적 반응을 낳았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이재오 원내대표는 "국민들께 백배사죄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때는 어린이 성추행 살해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이어서 국민이 받은 충격은 더욱 컸다. 최 의원은 사무총장과 중앙당 공천심사위원장에서 물러났고 한나라당을 떠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최 의원 사건은 '한 국회의원의 비뚤어진 일탈, 그리고 수습'에 초점이 맞춰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사건의 본질은 뒷전으로 밀려났고, 이벤트와 정치적 계산이 난무하고 있다.

강주안.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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