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44. 우드스탁 폐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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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1997년 12월 우드스탁에서 열린 헌정음반 제작 축하 모임. 필자(右)는 이 자리에서 이남이(左)씨와 즉흥 연주를 벌였다.

우드스탁을 찾아온 친구들은 내게 술을 한 잔씩 권하곤 했다. 거절할 수도 없고 반갑기도 해 주는 대로 받아 마시다 보니 나는 매일 술에 절어 있었다. 술이 술을 마신다고, 팔고 남은 술을 혼자 밤새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내가 워낙 주당이라 버텼던 것이지, 보통 사람이었으면 감당하기 힘들었을 게다.

하루는 손님들에게 가게를 맡겨두고 잠깐 나갔다 들어왔다. 그런데 가게 입구에서부터 대마초 냄새가 나는 게 아닌가. 한달음에 뛰어가 문을 열었다. 다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나 몰래 대마초를 피운 것이었다. 내가 대마초 때문에 얼마나 크게 데었던 사람인가. 이러다간 큰일 나겠다 싶었다. 할 수 없이 사람들을 다 쫓아내고 문고리를 걸었다. 클럽 우드스탁의 문은 그렇게 닫혔다. 문을 닫아도 말썽은 끊이질 않았다. 한밤중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려댔다.

"모시러 왔습니다. 가락시장에 자리를 만들어놨거든요."

후배들이 술을 같이 마시자며 몰려온 것이었다. 이미 술에 얼큰히 취한 녀석들이었다.

그때부터 바깥쪽 문고리를 뜯어버렸다. 안에서 잠그면 밖에선 절대로 열 수 없도록. 그 뒤로 우드스탁은 내 작업실 겸 집으로 사용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음악에만 몰두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으로 말이다. 지금도 우드스탁에는 문고리가 없다.

처음 우드스탁을 열 때 문정동은 허허벌판이었다. 건물이라곤 세 채뿐이었다. 서울에서 가장 조용한 곳이라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점점 번화가로 발전하는 바람에 조용한 인생과는 거리가 멀게 됐다. 공사가 하나 끝나면 하나가 또 이어지는 식이었다. 게다가 우드스탁은 지하에 있었다. 아주 피곤한 인생이었다. 그러나 먼지를 뒤집어쓰면서도 음악에 파묻혔다. 1992년에 100여 명이 합창하는 15분짜리 곡 '너와 나의 노래'를 작곡했다. 94년에는 데뷔 35주년 기념 음반 '무위자연'을 냈다. 무위자연을 발표한 뒤인 90년대 중반 즈음엔 나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요즘도 한창 유행하는 리메이크 붐이 불었다. 조관우는 김추자가 불렀던 '님은 먼 곳에'를, 신효범은 '님아'를 리메이크했다. '아름다운 강산'이야 80년대에 이선희가 불러 내가 부른 것보다 더 유명해질 정도 아니었던가. 그러더니 봄여름가을겨울.강산에.한영애.윤도현.김광민 등 후배들이 96년 겨울 헌정음반 '트리뷰트 투 신중현'을 내놨다. 음악인생 40년의 보람을 한껏 느끼게 할 만한 일이었다.

그즈음 KBS-1TV '일요 스페셜'과 EBS 'TV 인생노트'에서 내 특집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그 프로그램을 만들던 PD들은 아주 고생했다. 나와 관련된 영상 자료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활동 금지를 당하고 내 모든 곡이 금지곡으로 묶이자 방송국에서도 나와 관련된 모든 영상물을 파기했던 것이다.

국가 정책이 어떻게 되더라도 예술인과 관련된 자료들은 남겨두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잘했든 잘못했든 모든 기록물은 역사의 증거로서 가치가 있으니 말이다. 방송 활동을 참 많이 했는데 그 자료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게 안타깝다.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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