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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충기 펜화공방] 타봤습니다, 여기는 강릉행 KTX 운전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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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판으로 꽉 찬 운전석. 터널로 들어가면 앞에는 오직 선로만 보인다.

계기판으로 꽉 찬 운전석. 터널로 들어가면 앞에는 오직 선로만 보인다.

어~하다 강릉 가는 시대가 왔다.
강릉은 서울에서 직선거리로 170km 정도지만 심리적으로는 그 두 배쯤 된다. 경강선 KTX가 이를 한방에 해결했다. 1시간54분에 서울~강릉을 주파한다. 인천국제공항에서 강릉까지는 쉬지 않고 2시간이면 간다.

평창겨울올림픽을 앞두고 시험운행중인 최신형고속열차 ‘3세대 산천’에 올랐다. 서울-청량리-상봉-양평-만종-횡성-둔내-평창-진부-강릉 모두 10개역을 지난다.
11월29일 오전 9시 서울역을 출발했다. 객실 모니터에 서울을 비롯한 영서지방의 미세먼지 농도가 빨강색으로 표시됐다. 나쁨 수준이다. 강릉은 한때 나쁨 수준인 노란색이다. 용산에서 청량리 쪽으로 접어들자 오른쪽 창으로 한강의 눈부신 물비늘이 가득하다. 이 구간에서는 기존 철로를 넘나들어야해 속도를 내지 못한다.

청량리에서는 하루 8회 출발한다.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10편을 포함해 청량리역은 모든 열차가 선다. 상봉역은 그 절반인 9편이 선다. 서울 강남 쪽에서 지하철7호선을 타면 상봉역이 가깝다. 팔당호와 남한강을 옆구리에 끼고 달리니 금세 양평이다. 눈 덮인 산과 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원주 만종역까지의 선로는 기존의 중앙선을 개선했다. 만종에서 강릉까지는 전용철도를 새로 깔았다. 노선에 터널이 모두 34개다. 만종을 지나면 특히 터널이 많아 창밖 풍경이 툭툭 끊긴다. 속도를 앞세운 고속철이니 여행의 재미는 그만큼 없다. 효율과 낭만은 양립하지 않는다.

오대산 들어가는 입구인 진부역에서 1분간 정차했다. 스케치북을 들고 객차에서 내려 맨 앞 기관실에 올랐다. 안전점검을 하는 국토부 감독관들과 함께 기장 뒤에 섰다. 다시 터널 속으로 열차가 진입했다. 대왕고래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이럴까. 슬쩍 두려움이 일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선로 가운데 장애물이라도 떨어져 있으면 어쩌나, 맞은편에서 열차라도 오지 않을까, 짧은 시간에 갖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시운전이라 천천히 가지만 제대로 달리면 체감속도가 엄청날 테다. KTX 산천의 설계최고속도는 시속 330km, 운행최고속도는 시속 300km, 경강선은 시속 250km로 달린다. 속도계에는 400km까지 표시돼있다. 시속 300km까지 316초가 걸린다.

자동차와 달리 운전석에 핸들이 없다. 기장은 네모난 제어 박스 양쪽에 달린 작은 봉을 움직여 열차를 통제한다. 좁고 납작한 유리창으로는 선로만이 보인다. 속도를 높일수록 시야는 더욱 좁아진다. 생각보다 진동이 적어 선채로 스케치를 하는데 무리가 없다. 여럿이 타 기관실 분위기가 어수선한데도 기장은 침착하다. 마이크를 들어 안내방송을 하는 목소리가 성우 뺨친다. 불안이 가시며 끝없는 어둠에 익숙해진 어느 순간 앞이 뻥 뚫렸다. 햇살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바로 강릉이다. 역사를 나서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똑바로 볼 수 없을 만큼 하늘이 푸르고 바다에서 밀려오는 공기가 폐부를 찌른다.
올림픽 파크는 강릉역 코앞에 있다. 초당동 허난설헌 생가 앞에서 점심을 먹으며 동네 분들과 몇 마디 나누었다.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고장인데 KTX 덕에 부동산값이 뛰었단다. 2억5000만원이면 괜찮은 ‘32평’아파트를 살 수 있다고 했다. 안목항에서 바다를 보며 커피를 마시고 강릉역으로 돌아오니 3시. 서울역에 내리니 오후 5시14분이었다.

안충기 기자·화가 newnew9@joo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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