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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배신·협상…살레 전 대통령의 피살, 예멘에 먹구름 더하다

중앙일보

입력

예멘 수도 사나에서 후티 반군이 살레 전 대통령을 살해했다. [AP]

예멘 수도 사나에서 후티 반군이 살레 전 대통령을 살해했다. [AP]

 내전이 계속되고 있는 예멘에서 알리 압둘라 살레 전 대통령이 한때 손을 잡았던 후티 반군에 살해당했다. 쫓겨난 독재자였지만 최근 전쟁 피해를 완화할 협상에 나섰던 그가 사라지면서 내전과 기근, 콜레라로 세계 최악 수준의 인도주의 위기를 맞고 있는 예멘의 미래는 더 어두워졌다.
후티 반군은 지난 4일(현지시간) 자신들이 통제하는 알마시라TV 등을 통해 “반역자의 우두머리가 죽었다"고 밝혔다. 반군 측은 살레 전 대통령이 차량으로 예멘 수도 사나를 빠져나가려 하자 로켓포를 쏜 뒤 총격을 가해 살해했다.

2006년 11월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엘리제궁을 방문한 알리 압둘라 살레 당시 예멘 대통령. [AFP=연합뉴스]

2006년 11월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엘리제궁을 방문한 알리 압둘라 살레 당시 예멘 대통령. [AFP=연합뉴스]

후티 반군은 담요에 놓인 살레의 시신을 트럭에 싣는 영상도 찍어 소셜미디어 등에 올렸다. 그의 시신 주변에서 무장 대원들은 환호하며 아랍어로 “신은 위대하다"고 외쳤다.
살레 전 대통령은 2011년 ‘아랍의 봄' 여파로 예멘에서 반정부 운동이 거세게 일자 2012년 대통령직에서 쫓겨났다. 1978년 북예멘 대통령에 오른 이후 33년간 독재자로 군림한 그는 스스로 “뱀이 머리 위에서 춤을 췄다"고 말할 정도로 권력 유지에 능했던 모략가다. 1990년 남예멘과 통일을 이뤄냈지만 2004년 후티족 지도자를 암살토록 하는 등 내전의 뿌리가 된 후티족 탄압을 주도했다.
살레 전 대통령이 죽음을 맞은 과정에는 시아파 이란과 수니파 사우디아라비아의 대리전이 된 예멘 내전의 참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2012년 살레 정권이 무너진 뒤 예멘에선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 현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정상화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높은 실업률과 정부의 연료비 인상으로 촉발된 반정부 시위에 힘입어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후티 반군이 2014년 수도 사나를 점령하고 하디 정부를 수도에서 쫓아냈다. 살레는 이 과정에서 후티 반군과 연대해 하디 대통령에 반기를 들었다. 전 대통령이 반군과 손을 잡고 사우디의 지원을 받는 하디를 대신해 다시 권력을 잡으려 한 것이다.

사우디의 공습 현장을 둘러보는 주민 [중앙포토]

사우디의 공습 현장을 둘러보는 주민 [중앙포토]

시아파 이란의 영향력이 자국 뒷마당인 예멘에서 커질 것을 우려한 사우디가 아랍권 수니파 국가들과 동맹군을 결성해 2015년 군사 개입에 나서면서 예멘 내전이 본격화했다.
내전이 교착 상태에 빠진 지난해 말부터 후티 반군과 살레 사이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살레를 지지하는 무장 대원들과 반군이 최근 사나에서 전투를 벌였다. 지난 2일 살레는 사우디 동맹군이 예멘 봉쇄를 풀고 공습을 중단하면 휴전 중재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후티 반군이 그를 반역자라고 비난하며 공격에 나섰다.
이코노미스트는 “예멘에서의 무의미한 충돌로 인해 세계 최악의 인도주의 위기가 초래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엔에 따르면 예멘 인구 2800만 명의 4분의 3이 장기간 지속된 내전과 콜레라 등으로 물과 식량 등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내전 속에서 고통받는 예멘 사람들. 한 어린이가 부상 당해 치료받고 있다. [AFP=연합뉴스]

끝이 보이지 않는 내전 속에서 고통받는 예멘 사람들. 한 어린이가 부상 당해 치료받고 있다. [AFP=연합뉴스]

미국과 영국 등 서방은 사우디에 무기를 판매하면서 예멘 강공책을 주도하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편에 서 있는 모양새다. 이코노미스트는 사우디가 예멘의 반군을 겨냥해 공습을 이어가면서 민간인 피해가 속출하고 있는데 모두 서방의 전투기이며 서방 위성이 폭탄을 안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예멘에선 8600여 명이 폭격과 교전 등으로 숨졌고, 약 5만 명이 부상했다.
국제전과 내전이 겹친 예멘이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빈 살만의 사우디는 내전 개입을 더 강화할 전망이고, 후티 반군의 활동이 거세질수록 이란의 배후 영향력도 커질 수밖에 없다.

2015년 사우디가 예멘 내전에 개입한 뒤 예멘의 후티 반군은 탄도 미사일을 수시로 발사하고 있으나 상당수가 패트리엇에 요격된 것으로 알려졌다.

2015년 사우디가 예멘 내전에 개입한 뒤 예멘의 후티 반군은 탄도 미사일을 수시로 발사하고 있으나 상당수가 패트리엇에 요격된 것으로 알려졌다.

BBC는 “내전의 책임이 있지만 살레의 뛰어난 협상력 없이는 예멘 내전과 인도적 위기 양상은 악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그가 후티 반군과 함께 하면서도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UAE)에 협상 의지를 전달해왔었기 때문이다.
사나의 상황이 악화하면서 유엔은 구호단체 대원들의 안전도 불투명해졌다고 밝혔다. 폭격에 다친 민간인을 치료할 앰뷸런스도 진입이 어려운 실정이라고 한다. 유엔은 “5일 일정 시간 동안만이라도 휴전을 해주면 민간인과 대원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겠다"고 제안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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