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당사자 동의 없는 컴퓨터 압수, 법관들 할 일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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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을 조사 중인 법원의 추가 조사위원회가 그저께 의혹의 진원지가 된 법원행정처 사무실 내 3대 이상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복사하는 방식으로 확보했다. ‘특정 성향의 판사를 뒷조사한 문건이 들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과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전·현직 심의관 2명이 사용한 컴퓨터의 하드디스크가 그 대상이다. 조사위 측은 해당 컴퓨터는 법원행정처가 소유·관리하는 공용물이고, 공공의 이익을 위한 조사라서 아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사자들이 부동의한 상태에서 사실상 강제조사에 나선 것은 새로운 법적 논란을 낳고 있다. 일단 하드디스크를 복사할 때 사용한 이미징 방식 자체가 검찰이 범죄 혐의자의 컴퓨터를 압수수색할 때 주로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장주의 위반 등 조사 절차의 적법성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특히 조사 과정에서 원래의 목적과 무관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상고법원 추진, 당시 국회 접촉 상황 등 사법 행정 관련 자료들이 대거 확보될 수도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의 사법부가 국제인권법연구회원이 주축인 조사위를 통해 사법부 적폐청산과 인적 청산의 근거를 확보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국정원 개혁위원회와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의 일부 인사가 비밀인가권이 없음에도 무단으로 국가기밀에 접근해 과거 정권의 비위 자료를 확보한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해당 판사들의 동의 없는 컴퓨터 조사는 향후 나쁜 선례가 될 수도 있다.

이번에 당사자들이 법적 대응에 나서면 법원은 갈등과 혼란에 빠져들게 뻔하다. 사법부는 사회적 분쟁이나 갈등, 논란이 있을 때 이를 심판·해결하는 국가기관이다. 사법부 스스로가 논란을 야기하면 그 판단은 누가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