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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지도자 사명은 국민 전체의 평균적 의견 구하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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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진석 추기경이 27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 별관에서 서임 후 첫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 선교 계획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안성식 기자

"국가 지도자의 사명은 국민 전체의 평균적 의견을 구하는 겁니다."

한국 천주교의 새 추기경으로 임명된 정진석(75) 추기경이 27일 오후 3시 서울 명동성당 별관에서 추기경 서임 후 첫 기자회견을 했다.

정 추기경은 지도자론을 펼쳤다. 추기경은 "국가 지도자라면 이것만 따라와야 한다고 주장하면 안 된다"며 "자신의 의견을 줄이는 대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추기경은 "역사에 남을 훌륭한 지도자가 되려면 국민 다수의 소망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 추기경은 "자신의 생각을 조금씩 빼고 줄이지 않으면 대화나 타협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전제하고 "상대방 입장에 서서 상대를 이해할 때 비로소 대화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추기경은 신문에서 읽은 한국인의 평균적 얼굴(중앙일보 2004년 12월 13일 1, 5면)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한국인의 눈.코.귀의 공통점을 컴퓨터로 취합한 '평균적 얼굴'이 있듯 국민 4800만 명의 생각을 조합하면 평균적 의견을 구할 수 있다는 것. 또 이런 평균적 의견으로 사회 양극화, 좌우 이념논쟁 등의 현안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정 추기경은 특정 정치인에 대한 언급은 피했다. 노무현 대통령,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등에 대한 당부를 묻는 질문에 "지도자에 대한 평가는 조심스럽고, 또한 두려운 일"이라며 완곡하게 사양했다. 또 "저는 사회 문제에 대해선 아마추어라 할 말이 많지 않다"며 "정치.경제.교육.법률 등 각계 전문가들이 잘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천주교 평양교구장을 겸직하고 있는 정 추기경은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계속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남한의 일방적 지원에는 다소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사람은 정이 오고 가는 존재입니다. 제가 청주교구장으로 있을 때 무료식당을 운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불편해 했어요. 거저 얻어먹는 데서 인격적 손상을 느낀 거죠. 상징적이나마 적은 돈을 받자 사람들이 어깨를 펴고 먹었습니다. 북한을 도와주는 것도 그쪽의 체면을 살피면서 해야 합니다. 또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 국민도 그걸 아쉬워합니다. 북한은 자체적으로도 식량난 해결에 나서야 해요."

정 추기경은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지난 10년 동안 매년 10억원씩, 총 100억원에 이르는 식량.물자 등을 지원했다"며 "북한을 돕는 게 예전보다 힘들어졌지만 인도적 차원의 지원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학법 개정안에 반대했던 정 추기경은 교육문제에선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사학법의 특정 조항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고등학생들을 수능시험 점수 따는 기계로 만들어버린 오늘날의 교육 시스템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지도자를 키울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정 추기경은 "한국의 제2 추기경은 한국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반영한다"며 에피소드를 공개했다.

"1960년대 중반 로마에서 공부할 때였습니다. 그곳 고등학생 10여 명을 만난 적이 있는데 제가 어느 나라인지 물어왔어요. 알아맞혀 보라고 했죠. 그런데 한 명도 한국 얘기를 안 해요. 속상해서 지도책을 꺼내라고 했죠. 그런데 지도상에 한국이 일본으로 나온 거예요. 그게 당시 현실이었습니다. 80년에 다시 로마에 갔을 때 일부러 고등학생을 찾아가 똑같은 질문을 했어요. 일본인.중국인 다음에 한국인이 나왔습니다. 이번 추기경 임명도 그간 국민 전체가 땀 흘려 노력한 결과입니다."

새 추기경은 김수환(84) 추기경을 '스승이자 대선배, 큰형님'에 비유했다. 그리고 "추기경에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여러 측면에서 김 추기경의 지도를 받겠다"고 했다.

정 추기경은 "그간 교계 일부에서 '보다 젊은 추기경'을 원한 적도 있었다"는 질문에 여유있게 대처했다.

"베트남에선 69년 김수환 추기경이 임명된 후 첫 추기경이 나왔어요. 김 추기경님보다 연세가 높은 분이셨죠. 그런데 이분이 얼마 후 세상을 떴습니다. (베트남의) 두 번째 추기경도 비슷하게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지금 베트남에는 다섯 번째 추기경이 있습니다. 이제 대답이 됐나요."(웃음)

추기경은 북한 선교의 뜻을 분명히 했다. 추기경은 "그간 북한 측에 한국인이 아니더라도 사제 한 명이 상주할 수 있도록 여러 번 요청했으나 '아직 때가 아니다'는 대답만 들었다"며 "그래도 올해 판문점 인근 통일동산에 6.25에 대한 남북 쌍방의 회개와 보속을 기원하는 성당 건립을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새 건물은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 있는 성심성당처럼 전쟁의 비인간성을 뉘우치고, 남북 통일을 기원하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정호 기자 <jhlogos@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 바로잡습니다

2월 28일자 3면 정진석 추기경 인터뷰 기사에서 '회개와 보석'은 '회개와 보속'을 잘못 쓴 것입니다. '보속(補贖)'은 가톨릭에서 지은 죄 때문에 일어난 나쁜 결과를 보상하는 일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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