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정의사회의 주춧돌|김태길<서울대 명예교수·철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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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구조적 모순과 도덕성의 타락으로 크게 엉클어진 오늘의 한국을 정의로운 사회로 바꾸는 일은 임기가 5년으로 제한된 한사람의 대통령에게 기대하기에는 너무나 거창한 과제다. 그러나 미래의 한국이 해결해야 할 가장 절실한 문제가 바로 이 사회정의 문제인 까닭에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 책임을 지고 출발하는 차기 대통령으로서 최대의 관심을 기울여야 할 문제도 바로 이것이 아닐 수 없다.
5년의 기간 안에 사회정의를 구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 주춧돌을 바르게 놓는 일은 가능할 것이며, 이 일만은 차기 대통령이 기필코 이룩해야할 가장 큰 과업이라고 생각된다.
사회정의 문제 가운데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소득분배의 문제다. 우리 나라의 여러 가지 실정을 고려할 때 보수정당의 대통령으로 공정한 분배의 과제를 단시일 안에 만족스럽게 풀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국민의 대 화합이라는 큰 목포를 위해 보다 근본적인 것은 이른바 지역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빈부의 격차문제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이 문제에 성실한 슬기로써 대처해야할 것이다.
공정한 분배를 위한 정지작업으로 새 정부는 우선 저소득층 내지 소외계층의 보호에 필요한 제반 법규를 보완하고 이들 법규가 엄격히 지켜지도록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근로기준법·최저임금 법·노동조합법 등을 철저히 보완하고 그러한 법규들이 사문 화하는 일이 없도록 책임을 다해야 한다.
공정한 분배를 위한 정지작업으로서 둘째로 해야 할 일은 저소득 층 내지 소외된 계층의 권익을 공식으로 대변할 수 있는 정당과 단체를 육성하는 일이다. 「작은 정부」를 공언한 차기 대통령의 정치철학이 분배 문제에도 소극적 태도로 임하겠다는 뜻을 함축한다면 저소득층 내지 소외계층이 스스로 자신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나설 필요는 더욱 크다.
우리 나라 사회 현실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지하에서 비공식 투쟁을 전개하도록 만드는 것보다 그들이 합법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표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편이 바람직하다.
공정한 분배 문제와 관련해 새 정부가 당장 실천에 옮겨야 할 과제 가운데 사회복지정책을 점차 강화해 실시하는 일이 중요하다.
국민의료보험 문제, 노인생활보장 문제 등을 포함한 어려운 사람들의 기본생활을 보장하는 문제에 대해 이름뿐이 아닌 실질적 대책을 정착시키는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새 정부가 역점을 두어야할 중대한 과제의 하나다.
정의로운 사회 실현을 위해 공정한 분배가 요구되는 것은 경제적 가치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상과 행동의 자유, 교육과 사회 참여 기회 등 무형의 가치도 국민 모두에게 공정히 분배되어야할 기본적 가치다. 쉽게 말해 경제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특권층이 자취를 감추어야 참된 정의 사회라고 부를 수 있고 민주국가라고 일컬을 수 있다.
우선 정치·관료 사회의 특권층이 자취를 감추어야할 것이다. 군대사회에서나 적합 함직한 수직적 위계질서의 풍토가 정치·관료사회에까지 만연할 때 국민생활의 모든 분야가 그 풍토의 영향을 받고 같은 색깔로 물들게 된다.
조선조시대의 관존 민비 전통과 일제시대의 강압정치 영향을 청산하지 못하고 출발한 한국의 정치·관료사회에 군인문화의 영향까지 겹쳐 공직자사회에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의 풍조가 현저한 것이 현실이다.「보통사람」으로 자처하는 차기 대통령이 솔선 수범하여 권위주의와 관료주의를 물리치고자 하는 뜻을 가졌다는 보도를 환영하는 동시에, 새 정부의 모든 정치인과 관료들이 그의 뜻을 따라 우리 사회로부터 특권의식과 특권층을 추방하는데 힘을 합하기 바란다.
겉으로 드러난 특권의 향유뿐 아니라 남모르게 진행되는 권력의 남용도 근절되어야 한다. 나라를 위해 맡겨진 공권은 국민 전체를 위해 공평히 사용되어야 하며, 자신 또는 가까운 사람의 이익을 위해 부당히 사용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정의로운 사회 실현을 위한 정지작업으로서 차기 대통령이 반드시 수행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는 법질서의 확립이다. 우선 현행법 가운데 비민주적 조항들을 삭제 내지 수정하여 법체계의 미비한 점을 보완해야할 것이며, 다음에는 그 법이 만인에 의해 지켜지도록 사법의 권위가 확립돼야 한다.
다시 말해 국민 모두를 차별 없이 대접하는 법이 국민 모두에 의해 지켜지는 법질서의 기틀을 잡는 일은 정의로운 사회 구현을 위한 기본조건이다.
국민이 법을 믿지 못하면 정의로운 사회 실현은 막연한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을 가진 강자들이 법을 지키지 않을 때 법질서는 기반부터 무너진다. 국민의 윤리의식이 혼란에 빠져 사회의 기강이 흔들려도 법질서는 궤도에 오르지 않는다.
경찰·사법부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함으로써 범죄를 극소화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국민들 가운데 비뚤어진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이 나오지 않도록 밝고 명랑한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이다. 열심히 일해도 살기 어려운 사람이 많거나 빈들빈들 놀면서도 사치스런 생활을 하는 무리들이 있으면 밝고 명랑한 사회 분위기는 기대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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