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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깃발 없는 기수 정진석 추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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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레사는 1515년 스페인 아빌라에서 태어나 1582년 서거한 가톨릭사상 가장 유명한 성녀 중의 한 사람이다. 흔히 대(大) 테레사로 불리는 그녀는 21세의 나이로 수도원에 입회함으로써 수녀가 됐다. 그녀가 수녀원에 들어갈 때에는 수도원이라기보다는 귀족들의 사교장이었으며, 아직 시집 못 간 처녀들이 알맞은 짝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던 일종의 대기소와 같은 곳이었다. 그녀는 이러한 수도원을 초기의 사막수도자들처럼 엄격하고 가난하며 고독한 수녀원으로 개혁할 것을 결심해 '봉쇄' '고독' '잠심'을 3대 목표로 내세우고 이를 과감하게 실천해 나갔다.

그녀는 자신이 개혁하는 수녀원의 이름을 '맨발의 수도원'이라 불렀다. 그녀는 수도자의 발에서 신발마저 벗김으로써 청빈정신을 실천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많은 귀족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던 성직자들은 도대체 이처럼 어리석기 짝이 없는 수도원 개혁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그녀를 질타했다.

이 혼란한 시대에 수도원이 스스로 외부와의 문을 단절하고 평생을 수도원에 갇혀 기도만 하는 관상생활이 사회에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기득권을 누리던 모든 성직자의 질문이었다. 이에 테레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전쟁터에서는 적과 싸우는 병사들만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전쟁터에서는 비록 칼과 총을 들고 있지는 않지만 깃발을 들고 있으므로 모든 병사에게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희망과 승리를 약속하는 상징적인 기수(旗手)들도 있습니다. 이 기수들은 오히려 병사들보다 부상이나 상처를 입어도 쓰러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쓰러지면 깃발도 함께 쓰러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수는 적(악의 세력)으로부터 표적이 되기 쉽습니다. 적들은 기수를 쓰러뜨림으로써 그를 따르는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집중적으로 기수를 공격하게 마련입니다. 우리들의 수도자들은 전쟁터의 기수와 같은 것입니다."

2006년 2월 22일 낮 12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새로 탄생되는 15명의 추기경 명단을 발표하면서 그중에 한국의 정진석 대주교를 포함시켰다. 이로써 1969년 김수환 추기경이 임명된 이후 37년 만에 우리나라는 두 명의 추기경을 보유한 세계적으로 천주교의 위상을 드높인 나라가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450만 명의 천주교인을 가진 종교국가이자 세계 종교사상 유례없는 수많은 순교자를 낳은 성지, 대한민국에 이제야 두 명의 추기경이 탄생됐다는 것은 만시지탄의 느낌이 있지만 어쨌든 '하느님께서 우리나라를 축복해 주셔서 또 한 사람의 추기경을 이끌어 주셨다'고 첫인사를 한 정진석 추기경의 말처럼 하느님은 우리나라에 은총의 강복(康福)을 내린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또 한 명의 추기경의 탄생은 국가적 경사로서 영광의 훈장이자 승리의 갑옷일 것인가. 아니다. 정진석 추기경의 탄생은 성 테레사의 말처럼 적으로부터 반대 받는 표적이 됨으로써 집중 포화를 받아도 결코 쓰러질 수 없는 또 한 명의 깃발 없는 기수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악의 논리와 궤변의 사술이 노골적으로 횡행하는 이 세기말적 시대에 또 한 명의 붉은 수단의 정진석 추기경이 탄생됐으니, 그는 그 붉은 핏빛의 추기경 옷이 암시하듯 십자가의 깃발을 들고 못에 박혀 죽기 위해 맨발로 골고다의 언덕을 향해 걸어가는 또 하나의 죄 없는 죄수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느님.

이 가엾은 맨발의 죄인, 정진석 추기경을 불쌍히 여기소서.

깃발 없는 기수, 정진석 추기경이 온갖 부상과 상처에도 쓰러지지 않는 불굴의 용기를 주소서.

그리하여 '이제 다 이루었다'하고 고개를 떨구며 숨을 거두신 사람의 아들처럼 정진석 추기경도 기수의 역할을 다 이룰 수 있도록 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최인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