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기자의약선] 카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8면

육류.해산물.채소 등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려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는 카레(curry). 다양한 식재료를 프라이팬에 넣고 볶은 뒤 물을 붓고 푹 삶다가 카레 가루를 뿌려 걸쭉하게 끓여내기만 하면 조리 끝이다.

요즘 서양에선 인도의 대표 식품인 카레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알츠하이머형 치매를 예방하는 웰빙 식품으로 여겨서다.

동물실험에선 이미 카레가 치매 예방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 UCLA대 연구팀은 쥐의 뇌에 뇌세포를 파괴하는 단백질 플라크인 베타 아밀로이드(알츠하이머병 환자의 뇌에서 많이 관찰됨)를 주사했다. 이어 카레 성분인 쿠르쿠민을 사료에 섞어 먹였다. 이 결과 쿠르쿠민이 베타 아밀로이드의 독성을 절반 수준으로 줄이는 것으로 확인됐다. 미로를 이용한 기억력 검사에서도 쿠르쿠민을 섭취한 쥐가 상대적으로 뛰어난 기억력을 보여 주었다.

쿠르쿠민은 카레의 노란색 색소 성분으로 강력한 항산화 물질이다. 알츠하이머병의 원인은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의료계에선 노화의 결과로 뇌에 유해산소가 많이 쌓이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카레.올리브유.토마토.등푸른 생선 등 항산화 물질이 풍부한 식품을 꾸준히 섭취하면 알츠하이머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가톨릭의대 성모병원 신경과 양동원 교수). 그러나 이미 알츠하이머병으로 진단된 상태라면 병의 진행을 늦추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된다.

동물실험에선 쿠르쿠민이 시판 중인 소염.진통제인 이부프로펜이나 나프록센보다 오히려 염증을 더 잘 가라앉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인도의 전통의학인 아유르베다 의학에서도 카레를 염증 치료제로 사용해 왔다. 전문가들은 이런 쿠르쿠민의 항염증 작용도 알츠하이머병 예방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선 카레가 알츠하이머병 예방을 돕는다는 결정적 증거를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카레를 즐겨 먹는 인도인의 치매 발생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으며, 인도의 일부 지역에선 65세 이상 노인의 치매 발병률이 1%(한국은 10% 수준)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예사롭지 않다.

최근엔 카레가 유방암.대장암.전립선암.피부암 등 각종 암의 예방 식품으로 기대되고 있다. 역시 쿠르쿠민 덕분이다.

영국 레스터대 의대 연구팀은 아시아계 주민이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레스터시에서 결장암(대장암의 일종) 진단을 받은 환자 500명을 조사한 결과 아시아계는 2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이들이 즐겨 먹는 카레 속에 발암 억제 성분이 들어있기 때문으로 추정됐다.

지난해 미국 텍사스대 MD 앤더스 암센터의 연구진은 생쥐를 이용한 동물실험에서 쿠르쿠민이 유방암의 전이를 막아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지난해엔 쿠르쿠민이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 세포를 죽인다는 논문(Cancer, 8월 15일자)도 나왔다.

카레라는 명칭은 남인도.스리랑카의 '카리'(kari)에서 나왔다. '국물' 또는 '여러 종류의 향신료를 넣어 만든 스튜(stew)'라는 뜻이다. 이처럼 카레는 한 가지가 아니라 아니라 20여 가지의 재료(강황.후추.계핏가루.겨자.생강.마늘.박하잎.칠리 페퍼.사프란.베이 잎.정향.육두구 등)를 섞어 만든 복합 향신료다(원광대 식품영양학과 이영은 교수). 석가모니가 고행할 때 즐겨 들었다는 카레가 유익한 것은 이런 '비빔밥 효과' 때문일지도 모른다.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