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곳곳이 금간 모교 교정 마음 아파 … 오늘 수능 보는 후배들아 힘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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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금나나(2002년 미스코리아 진)씨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본 연예인이었어. 2006년 포항여고 3학년 9반 교단 앞에 선 그의 당당한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당시 그는 경북과학고(포항 소재) 재학 시절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학교에 왔어. 반 친구들에게 미스코리아가 된 뒤 미국 명문 하버드대 입학에 도전했던 과정을 들려줬지. 그를 만난 뒤 나는 친구들과 “성공해서 꼭 모교 후배들을 다시 찾아오자”고 했었지.

포항여고 선배 기자의 편지 #‘학교 내진설계 부실’ 어른으로 미안 #너희들의 씩씩함에 되레 가슴 짠해

지난 21일 졸업한 지 11년 만에 모교를 찾았어. 금나나씨처럼 성공해서 찾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규모 5.4의 포항 지진 피해 현장을 취재하러 온 기자 자격으로.

기자들 사이에서 고3 수험생을 취재하려는 경쟁이 뜨거웠지만, 나는 선뜻 모교를 찾아올 생각을 하지 못했어. 심리적 혼란을 겪고 있을 후배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오늘 큰맘 먹고 찾아온 학교 주변은 거의 변한 게 없었어. 동창생들이 여고 시절 옛 맛을 잊지 못해 찾는다는 분식집도 그대로고 공부를 제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문제집만 왕창 사던 서점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 주인 아주머니와 나는 한눈에 서로의 얼굴을 알아봤어. 옛이야기를 나누다 “기자가 됐다”고 했더니 아주머니는 “후배들 힘내라고 좋은 기사 써 주면 좋겠다”고 당부하셨어. 교정에 들어서자 내부 곳곳에 지진 충격으로 금 간 흔적이 눈에 띄었어. 내가 공부하던 3학년 9반 교실은 천장재 일부가 떨어진 상태였어. 벽에 걸려 있던 선풍기는 아직도 나뒹굴고 있었지.

고3 후배 두 명을 만났어. 원자랑이란 예쁜 이름을 가진 후배는 “수능 당일 여진만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담담하게 말하더라. 너희보다 11년 선배인 포항여고 65회 졸업생이라고 내 소개를 했더니 또 다른 후배 학생은 “(선배님) 취재 현장이 위험할 텐데 조심하라”고 하더니 “날이 추운데 얇게 입고 다닌다”며 도리어 내 옷깃을 여며 줬어. 생각지 못했던 후배의 씩씩함에 짠한 마음이 들어 뭉클하더라.

행정안전부가 지난 16일 공개한 공공시설물 내진 성능 확보 현황에 따르면 전국 학교시설 2만9558개 중 23.1%(6829개)만이 내진 성능을 확보했대. 철도와 항만, 고속철도 등 기반시설의 내진율은 40~80%이지만 정작 자라는 학생들이 생활하는 학교시설은 77%가 내진 설계가 제대로 안 돼 있다는 얘기야. 선배로서, 어른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드는구나.

23일이 수능날이구나. 지진을 겪은 이후 많은 사람이 심리적으로 트라우마를 호소한다고 들었어. 어른들도 힘든데 하물며 수험생이자 청소년인 너희들이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구나.

수능과 지진으로 어수선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경구처럼 지금의 시기를 넘어서면 아마 먼 훗날 2017년 11월을 회상하는 날도 올 거야.

그때 너희들이 모교를 찾아와 10년쯤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구나.

사랑한다, 포항여고 후배들, 힘내라.

포항=백경서 기자(포항여고 65회 졸업생) baek.kyungse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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