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외환위기 그 날 ‘두 얼굴의 금융 천재’ 김석기 구속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외환위기 직후 벌어진 ‘골드뱅크 주가 조작 사건’의 핵심 인물인 김석기(60) 전 중앙종금 대표가 21일 구속됐다.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던 1997년 11월 21일로부터 꼭 20년 되는 날이다. 2000년 해외로 도피해 16년간 도피 생활을 한 김씨는 지난해 12월에 귀국했다. 그의 부인은 배우 윤석화(61)씨다.

2000년 해외 나가 16년 도피 생활 #작년 말 귀국 뒤 11개월 만에 기소 #1997년 설립된 골드뱅크 전환사채 #해외투자자가 산 것처럼 꾸며 인수 #주가 급등 … 시세차익 660억 추정 #IMF 혹한기 주식 산 1만여 명 피해

서울남부지법 김병철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21일 밤 “범죄 사실이 소명되고 증거인멸과 도망 염려가 있다”며 김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앞서 서울남부지검 증권범죄합수단(단장 문성인 부장검사)은 김씨를 불구속 상태로 수사해 오다 지난 17일 증권거래법 및 주식회사 외부감사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골드뱅크 주가 조작 사건=97년 설립된 골드뱅크는 ‘회원으로 가입해서 인터넷 광고를 클릭하면 돈을 준다’는 아이디어로 돌풍을 일으킨 벤처기업이다. 외환위기 혹한기인 98년 10월 코스닥시장에 등록해 승승장구했다. 99년 3~4월 골드뱅크는 말레이시아 역외펀드 라시와 드렉슬러가 골드뱅크가 발행한 해외 전환사채(CB) 700만 달러를 인수했다고 공시했다. 해외 투자금 유치 소식에 골드뱅크 주가는 폭등했다. 99년 4월 3만7500원이던 주가가 99년 5월 30만7000원으로 단숨에 10배 가까이 뛰었다.

그러나 라시와 드렉슬러는 해외 투자자가 아니라 김석기 중앙종금 대표의 해외 페이퍼컴퍼니(유령회사)였다. 미국 하버드대 경영학 박사, 미국 월가(베어스턴스 아시아영업본부장) 출신이란 화려한 타이틀을 가진 김 대표는 ‘금융의 귀재’ ‘편법의 대가’라는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다. 골드뱅크 주가가 폭등하자 김씨는 그해 6월 말레이시아 펀드가 샀던 것처럼 꾸민 CB를 주식으로 전환해 매각했다. 시세차익 규모가 660억원으로 추정된다. 다만 검찰은 구속영장 청구서에는 ‘불상의 이익’으로 표기했다.

◆뒤늦은 수사와 해외 도피=골드뱅크 시세 조종 의혹은 99년 10월 국정감사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당시 이사철 한나라당 의원은 “골드뱅크 주가 폭등이 여권의 비호를 받은 작전세력의 시세 조종에 의한 것이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시세차익이 여권 정치자금으로 들어갔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골드뱅크 주가는 99년 7월을 정점으로 급락세를 이어갔고, 외환위기로 허리띠를 졸라매던 애꿎은 일반투자자 1만여 명이 피해를 보았다.

검찰이 이 사건에 대해 본격적인 수사에 나선 건 2002년. 김씨는 이미 2000년 중앙종금이 부도처리된 후 사법처리를 피해 해외로 도피한 상태였다. 2002년 3월 검찰은 김씨를 주가 조작 혐의로 수배했다. 김씨는 홍콩에 머물다 영국으로 거처를 옮겼다.

◆도피 이후=잊혔던 김씨의 이름은 2013년 뉴스타파가 발표한 조세피난처 페이퍼컴퍼니 설립자 명단에 오르면서 다시 떠올랐다. 이후 지난해 8월 그가 영국에 체류 중이란 사실이 사법당국에 포착됐다. 영국과는 범죄인 인도 협약이 돼 있어 강제송환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러자 지난해 12월 변호인을 통해 검찰에 자수서를 내고 도피 16년 만에 귀국했다. 당시 “오랜 해외 생활에 심신이 지친 데다 구순 노모의 건강이 나빠져 귀국을 결심했다. 수사를 받고 정리하자는 생각이었다”고 자수 경위를 밝혔다.

김씨는 현재 법무법인 광장 등 대형 로펌의 변호사들로 꾸려진 변호인단의 도움을 받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그는 혐의의 일부만 인정하고 있다. 귀국 뒤 11개월 만에 구속시킨 것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외환법, 증권거래법 등 위반, 특정 배임 등 복잡한 사안이 여러 가지라 혐의 입증에 다소 시간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한애란·김준영 기자 aeyani@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