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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사제 일단 제동 … 불씨는 더 커질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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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20일 서울 여의도 KB국민은행 본점에서 KB금융지주 임시 주주총회가 열렸다. 윤종규 회장의 연임과 허인 은행장 내정자의 선임이 확정됐다. 한데 이날 주총의 쟁점은 이게 아니었다. KB금융그룹 노조협의회가 추천한 사외이사 선임 문제였다. 노조 측은 “공익을 대변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결과는 부결이었다. 노조의 제안에 대한 찬성표는 13.73%였다. 9.68%를 보유한 국민연금이 찬성했다. 이를 빼면 주주의 4.05%만 찬성한 셈이다. 노동이사제는 좌절됐다.

KB금융 노조 추천 이사 선임 무산 #문 대통령, 대선 때 공약으로 내세워 #제도 도입 땐 노조 경영 참여 길 열려 #기업 활동, 구조조정 등 걸림돌 우려 #이미 노동이사제 실시 중인 외국선 #노동계 전횡 막는 안전장치 마련 #“책임·권한 명문화 부작용 줄여야”

문제는 노동이사제 논란이 이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노동이사제는 현 정부의 공약이다. KB금융 사례는 신호탄이다. 비록 국민연금이나 KB금융 노조 측이 “노동이사가 아니라 사외이사를 추천한 것”이라고 했지만 상법상 이사는 사내·사외·비상임 이사로 나뉜다. 어느 쪽이든 각각 구분해 이사로 등기된다. 어떻게 이사가 되느냐의 문제일 뿐 노동이사인 셈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노동이사제는 노동자를 경영에 참여시킨다는 취지다. 이는 현행 노사관계의 뿌리를 뒤흔드는 일이다. 지금은 노사의 권한이 명확히 구분돼 있다. 경영 판단과 인사권은 사측의 고유 권한이다. 노동계는 임금이나 복지와 같은 근로 조건을 끌어올리기 위한 권한을 보장받았다. 파업이 벌어져도 대체인력 투입이 금지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회사가 사측에 우호적인 근로자를 모아 노조 설립을 지원하고 그들을 우대하는 것과 같은 노조 활동 방해 행위 등은 법으로 금지됐다(부당노동행위 방지). 대신 인사·경영권을 침해하는 단체협약을 무효로 보는 법원의 판결처럼 사측의 권한 또한 보호된다.

노동이사제가 도입되면 이 근간이 무너진다. 사측의 고유 권한인 경영에 노조가 발을 담그게 된다. 기업이라고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기업은 역으로 노조의 권한을 보호하기 위해 법에 정해놓은 규제, 즉 부당노동행위 처벌 조항을 없애고 파업 시 대체인력 투입을 허용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 형평의 논리에 따라 반대할 명분이 없다. 노동이사제를 운영하는 외국에도 부당노동행위 금지나 대체인력 투입 금지제도가 없다.

근로자 참여 및 협력 증진에 관한 법률에 따른 노사협의회 제도도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 회사는 노사협의회를 통해 경영 전반을 종업원에게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한다. 한데 노동이사를 앞세워 직접 경영에 참여하려는 노조가 굳이 협의회에 참여할 이유가 없어진다. 더욱이 노조가 단체협상을 통해 공장의 해외 진출까지 막는 상황을 고려하면 노동이사제는 기업의 경영 활동에 상당한 제약이 될 수 있다.

임금체계 개편이나 구조조정과 같은 사업장 내 문제는 물론 정부 차원의 산업 구조조정이나 공기업 체질 개선 정책에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특히 엄격한 비공개 사안인 이사회(경영 전략 수립 등) 내용이 노조에 전달될 경우 그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물론 노동이사제가 노동계의 주장처럼 공공성을 확보하고, 경영진의 전횡을 막는 효과를 낼 수 있다. 노동계는 독일과 같은 선진국의 사례를 그 근거로 든다.

그러나 노동이사제를 도입한 외국의 공통점은 협력적 노사관계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독일 노총은 노동개혁(하르츠개혁)을 수용했다. 폴크스바겐 노조는 2001년부터 2006년까지 고용을 유지하는 대신 임금을 20% 깎고, 근로 시간을 단축하는 만큼 월급을 적게 받았다. 사측과 1만3000명 직원의 구조조정도 합의했다. 한국에선 노사정 대타협을 한국노총이 4개월 만에 파기하고, 민주노총은 아예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지 않는다. 경제단체가 노동이사제는 힘 과시 창구로서 역할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이유다. 최근엔 외국 기업에서 노동이사제 회피 현상도 나타난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독일 대기업 중 알리안츠·바스프·이온 등은 본사를 노동이사제가 없는 영국 등으로 이전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노동이사제를 도입하려면 책임과 권한을 명확히 하는 정관 정비와 같은 제도적 장치를 노사정 합의와 같은 공론화를 통해 마련한 뒤 시행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고란 기자 wol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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