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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감쪽같이 바꿔치기 된 17세기 명화 … 300년간 세 도시 넘나들며 추적하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문학이 있는 주말

사라 더 포스의 마지막 그림 표지

사라 더 포스의 마지막 그림 표지

사라 더 포스의
마지막 그림
도미닉 스미스 지음
허진 옮김, 청미래

17세기 네덜란드 명화. 뉴욕. 부유한 변호사. 가난한 여자 대학원생. 감쪽같은 위조. 시드니. 암스테르담.

이런 주제어들이 눈에 띄는 장편소설이다. 주제어들을 제대로 배열하고 살을 붙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된다.

1957년 11월 뉴욕 맨해튼의 특허 변호사 마티의 집에서 명화 바꿔치기 사건이 발생한다. 고아를 위한 자선 만찬 도중 누군가 마티의 집안 가보로 내려온 네덜란드 여성화가 사라 더 포스의 걸작 풍경화 ‘숲의 가장자리에서’를 가짜로 바꿔치기한 것. 주범은 붙잡히지 않지만 사주를 받아 진짜 같은 가짜를 그린 종범은 곧 드러난다. 미술사 박사과정 공부를 하는 호주 출신 여성 대학원생 엘리가 위조범이다.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이야기의 분수령인데, 소설은 단순히 범인 색출이나 사건 규명에 만족하는 범죄소설이 아니다. 명화가 제작된 17세기 네덜란드, 바꿔치기가 벌어진 20세기 중반의 뉴욕, 하계 올림픽을 코앞에 둔 2000년 시드니. 세 개의 시공간을 부지런히 오가며 사건의 배후에서 동인으로 작동하는 인간 심연, 궁핍과 고통을 자양분 삼아 예술을 꽃피우는 인간 내면을 진지하게 살핀다. 엘리와 마티는 어느 순간부터 더이상 도난 사건의 범인과 피해자 관계가 아니다. 둘의 관계에 질적인 전환이 이뤄진다. 그 전환의 결과 두 사람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다시 한번 주고받는데, 그에 대한 회한과 자책, 용서와 화해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또 다른 축이다.

시대상이나 벌어지는 사건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일 텐데 소설 속 세 개의 시공간은 다른 작가가 쓴 것처럼 분위기가 다르다. 그렇게 느껴질 정도다. 특히 저자는 흥청거리는 뉴욕 상류사회의 여가와 소비, 상투성과 속물근성을 들추는 달인인 것 같다. 이야기에 설득당해 정신없이 따라 읽다 보면 계속해서 감탄하며 책장을 넘기게 된다. 가령 팔순 할아버지가 된 마티가 40년 만에 엘리와 재회하기 위해 시드니로 날아가는 장면, 1등석 여승무원이 마티에게 던지는 미소의 본질은 이런 것이다. ‘그것은 얌전한 정신박약아를 보며 짓는 표정, 누구를 향할지 알 수 없는 적의에 대비하는 보험 같은 미소이다.’(165쪽)

페미니즘 소설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상 남성들에게만 허용됐던 풍경화를 여성화가가 그렸다는 설정부터가 그렇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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