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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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896년 2월11일 새벽 경복궁 영추문을 빠져나오는 몇 개의 교자(교자)가 있었다. 궁녀들이 타는 교자라 수문군들도 그대로 통과시켰다.
이 교자행렬은 곧바로 정동의 러시아공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교자에서 내린 사람은 고종과 왕세자, 엄 상궁, 몇 사람의 궁인들이었다. 이것이 유명한 아관파천(아관파천)이다.
국왕이 파천함에 따라 내각도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졌고, 각 부서의 사무소도 공관부근에 차려졌다. 상하 관리들은 물론 각국 외교관들이 모두 이곳에 득실거리게 되니 아관은 그야말로 조선정치무대의 중심부가 되었다.
이 아관은 소련영사관으로 바뀌어 해방직후에도 잠시 존속했으나 곧 철수했고, 건물은 6·25때 파손되고 말았다.
아라사란 이름은 러시아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아라사 또는 아라사라고 썼다.
이 아라사가 우리나라와 땅이 맞붙은 이웃이 된 것은 불과 1백년 남짓한 역사밖에 안 된다.
1860년 (철종 11년) 중국의 천율조약에 의해 러시아가 청나라로부터 연해주를 빼앗은 뒤의 일이다.
러시아는 그 연해주 남단에 블라디보스토크항을 건설, 극동의 군사·무역 근거지로 삼았지만, 부동항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남쪽으로 내려가고 싶었다. 아관파천은 바로 그런 남하정책의 함정에 빠져든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어쨌든 한 소 관계사의 제1막은 이처럼 소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맞은 해방후의 제2막은 남북분단과 6·25라는 엄청난 비극으로 이어져 우리의 삶과 역사를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멀지 않아 제3막이 오르려 하고 있다. 소련이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92년전 인천에 정박중이던 군함으로부터 대포 1문과 수병 1백2O명을 서울로 진주시켜 아관파천을 연출했던 소련이 이번엔 유니폼도 산뜻한 5백20명의 대규모선수단을 이끌고 서울에 오는 것이다. 우리의 국력신장이 새삼 대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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