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교양] '저녁의 무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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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엄경희는 최근 펴낸 평론집 '질주와 산책'(새움)에서 '시인의 산문은 시보다 쉽게 이해되고 철학적 담론보다 부드럽다는 점에서 대중성이 있는 반면, 시에 비해 풀어져 있어 농도가 엷은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많은 시인들의 산문이 당대를 지나면 거의 읽히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있다' 등의 시집을 낸 시인 박형준(36)씨가 등단 13년만에 펴낸 첫 산문집인 '저녁의 무늬'는 '평균적인 산문'을 웃돈다.

우선 산문집 곳곳에 인천.서울의 변두리를 전전하며 성장해야 했던 시인의 고단한 삶과 혼기를 넘기고도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는 시인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근심, 열악한 삶의 조건들을 고스란히 시의 소재로 삼는 시인의 오히려 여유있는 태도 등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어떤 여름 '하느님이 비항아리에 구멍 뚫린 줄 모르고 사나흘 푹 주무시는 바람에' 폭우가 쏟아지자 시인이 세들어 살던 빈지하 방 장판에서 물이 솟구쳐 올랐다. 이주일간 인부들이 시멘트를 깨고 방수처리하는 법석 와중에도 시인은 작은 방에 틀어박혀 곤한 잠을 잘 수 있었다. 덕분에 밤이면 말똥말똥해질 수 있었던 시인은 '밤마다 A4 용지를 펼치고 엎드려 시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고 독서도 성실히 수행하는 때 아닌 축복을 맞았다'고 능청을 떤다.

시 쓴답시는 아들이 대견스럽기도 하지만 어머니의 걱정은 끝이 없다. 무릎병이 도지기 전까지 칠순 넘은 노인은 한달에 한번꼴로 고향 정읍에서 서울 아들 집을 찾아 밀린 빨래며 반찬을 마련해 놓고는 뒤죽박죽 철자법으로 편지를 남겼다.

10년간 모인 편지가 거의 예술이다. '냉장고 보약해다 노왔으니 낸비다 뜻뜻하게 뒤먹어라…너는 이 사회 생활리 시인 이요또 책을 만든는 작곡 작가로써 훌륭한 지급을 하나님께서 주으이…밥도 먹야 공부 하지 배곱프면 못산다 직장을 삿표내면 안된다.'

산문집 속 사연의 상당 부분이 결국은 '시'로 돌아간다. 어린 시절의 추억, 회상, 현재의 체험 등이 시적 자양분이 돼 시로 풀려나오는 과정,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상징의 비밀 등을 알 수 있다. 매끈한 문체, 산문 편편의 완결성도 눈에 들어온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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