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전 정권 수사와 항변의 메시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환란(換亂) 수사는 표적 수사다.”

1998년 5월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은 검찰에 이런 표현이 포함된 답변서를 보냈다. 김대중 정부 출범 뒤 외환위기를 초래한 경제 실정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이었을 때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강경식 전 부총리나 김인호 전 경제수석비서관을 ‘표적’으로 해 직무유기죄를 범했다는 혐의를 전제로 하고 있다. 당시 본인이 보고 겪은 사실에 입각하면 그런 혐의 사실이 인정될 만한 일은 추호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책의 방법이나 시기 선택 등에 관한 잘잘못에 대해 견해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사법처리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항변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바레인 방문을 위해 12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하며 여권의 적폐청산 활동과 관련해 입장을 밝히기에 앞서 마이크를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바레인 방문을 위해 12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하며 여권의 적폐청산 활동과 관련해 입장을 밝히기에 앞서 마이크를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19년 전 수사 선상에 올랐던 전직 대통령의 주장은 12일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인천국제공항 기자회견을 닮았다. 현 정부의 적폐청산 수사에 처음 내놓은 이 전 대통령의 입장은 '저항' 또는 '반격'의 메시지로 읽혔다.

이 전 대통령은 “이것이 과연 개혁이냐, 감정풀이냐 정치보복이냐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면서 “새로운 정부에서 갈등과 분열이 깊어졌다”고 비판했다.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령부의 정치 관여 의혹에 대한 수사는 그를 향하고 있다.

5년마다 반복되는 수사와 반격

지난 정부와 현 정부 충돌은 검찰의 수사를 매개로 정권마다 반복되고 있다. 검찰의 칼끝은 5년을 주기로 방향을 튼다. 1998년 환란 수사로 궁지에 몰린 김영삼 전 대통령은 5년 전에는 칼자루를 쥐었다. 취임(1993년) 이후 전두환ㆍ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리를 겨눴다.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수사는 전두환ㆍ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했다.

1995년 12월 2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앞에서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 [중앙포토]

1995년 12월 2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앞에서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 [중앙포토]

전 전 대통령은 1995년 12월 2일 검찰의 소환이 결정되자 서울 연희동 자신의 집 앞 골목에서 이른바 ‘골목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측근들과 함께 “대통령 김영삼의 문민정부는 5공과 6공에 대해서 과거사 청산이라는 근거도 없는 술책을 통해서 왜곡하려고 하였다. 검찰 소환에 절대 응하지도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경남 합천군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결국 구속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가 백담사 은거 2주년 법회에 한복차림으로 참석하여 기도하고 있다. [중앙포토]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가 백담사 은거 2주년 법회에 한복차림으로 참석하여 기도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순자 여사 "죽일까봐 백담사 간 것"

노태우 전 대통령은 5공 비리 수사(1988년)로 인해 친구였던 전 전 대통령과 악연이 됐다. 전 전 대통령은 강원도 백담사에 칩거(1988년 11월 23일부터 2년 1개월)했다.

구속을 면하는 방편이기도 했지만 2016년 전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여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6ㆍ29선언을 자기(노태우 전 대통령)가 했다고 하고 우리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는 건 아닌가 해서 빨리 백담사로 간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 여사는 회고록에서 6ㆍ29선언은 전 전 대통령이 만들어 노 전 대통령에게 양보한 것이라는 주장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임 중인 2003년 2월 청와대 춘추관에서 대북송금 파문에 대한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당시는 특검 수사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책임은 대통령인 제가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임 중인 2003년 2월 청와대 춘추관에서 대북송금 파문에 대한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당시는 특검 수사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책임은 대통령인 제가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노무현 회고록에 "검찰의 승부욕 두려워"

노무현 정부에서는 김대중 정부의 성과인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한 '대북송금'에 대한 특검이 있었고, 이명박 정부는 2008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리 의혹을 수사했다. 노 전 대통령 수사는 그의 투신(2009년 5월 23일)이라는 비극으로 끝났다. 노 전 대통령의 사후 회고록에는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검찰의 공명심과 승부욕이다”고 이 전 대통령에게 수사팀 교체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썼다가 보내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논두렁 시계 관련 보도. [사진 KBS, SBS]

논두렁 시계 관련 보도. [사진 KBS, SBS]

당시의 수사는 최근 검찰의 적폐 청산 수사 대상 중 하나다. 대통령을 망신주려는 공작이 있었다는 정황이 나오자 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이 “국정원이 명품 시계 선물을 언론에 흘리라고 제안했으나 거절했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의 ‘사자방(4대강ㆍ자원외교ㆍ방위사업) 비리’를 집중 수사했다. 이 전 대통령은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과장된 정치적 공세”라고 반응했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 농단 사건, 세월호 참사 관련 의혹,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 정치 공작과 4대강 사업 등을 수사 중이다.

김승현ㆍ한영익 기자 shyu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