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사의 새 장I―1987년을 보내면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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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987년은 우리에게 어떤 해였을까. 격동의 한해를 보내면서 느끼는 감회는 여느 해와는 달리 각별하기만 하다.
아슬아슬한 고비를 숱하게 넘기면서 용케도 한해를 마무리 지었다는 안도감이 앞선다. 그러면서도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는 사실에 눈을 돌리면 새삼 바위덩이 같은 중압감에 사로 잡히게 된다.
아직껏 그 치열했던 선거의 후유증은 가셔지지 않고 있다. 선거결과에 대한 평가도 날카롭게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상징되는 올해의 정치적 변혁이 민주화로 향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두말할것도 없이 우리는 이제 겨우 민주화로 향한 대장정에서 첫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앞으로 어떤 도전에 직면할 것이며 어떤 험난한 고비가 있을지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6월항쟁」으로, 그것이 마침내 12·16선거로 이어진 역사의 소용돌이를 돌이켜보면 바야흐로 도도한 강줄기를 이룬 민주화란 대세를 거스르거나 역류시킬 세력은 없다는 사실에 새삼 외경감이 든다.
우리 국민이 1987년에 스스로의 힘으로 확인하고 이룩한 것은 비단 주권재민의 민주적 가치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욕구가 응축되어 있다. 「6·29」를 받아낸것은 결국 국민의 힘이었으며, 그중에서도 중산층의 역할이 핵심을 이루었다.
중산층이 대세의 우이를 잡게된 현상은 그동안 높아진 의식수준과 경제성장에서 연유된다. 지금 우리는 1인당 국민소득 3천달러를 눈앞에 두고 있다. 경제적 바탕이 이쯤에 이르면 갖가지 욕구의 분출로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는 것은 어느 나라건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러한 갈등과 욕구를 어떻게 수용, 여과하고 조화시키느냐에 모아진다. 사회적 여건과 경제환경이 변하면 정치형태가 변화하는 것은 불가피한 추세다.
비록 12·16선거결과가 정당간의 평화적 정권교체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낙담할 것도, 좌절할것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진로는 확고히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한때 외국의 시각은 한국이 일본이 되느냐, 필리핀이 되느냐를 가름하는 분기점에 서있다고 지걱한바 있다. 옳은 말이다. 시계추를 다시 과거의 권위주의적 정치로 되돌려 놓는다는 것은 이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여기서 내년 2월에 출범할 노태우정부의 과제가 무엇인지는 분명해진다.
민주화 요구를 수용, 실천하지 못한다면 정권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가 될 것은 뻔하다. 선거과정에서 그가 공약한 안정은 커녕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도가니로 빠질 가능성도 없지않다. 우리가 그동안 누가 정권을 잡느냐 보다 민주화란 과제의 실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해온 까닭도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경제여건도 선진국과 어깨를 겨룰만큼 성장했다.「3저」덕도 있었다지만 올해만해도 1백억달러에 이르는 경상수지 흑자규모에다 13%선의 실질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정치적, 사회적 격변속에 일어난 노사분규를 큰 상처없이 극복해낸 한국경제의 저력은 생각할수록 대견하기만하다. 이만하면 우리국민의 자질과 능력에 자신감을 가져도 되지 않겠는가.
정치세력간의 대립격화와 국민저항의 확산으로 걸핏하면 위기설이 나오곤 했지만 실제로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사회적, 경제적 여건이 좌·우극단세력의 모험주의를 용납하지 않을만큼 성숙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민주주의는 일조일석에, 한번의 선거만으로 이룩되는 것은아니다. 템포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이른바 「군정종식」에 성공했다해도 마찬가지다.
민주화를 통해 진정한 정치안정을 성취하려면 국민과 정부, 정치지도자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피와 땀으로 쟁취하는것이지 누가 쥐어주는 것은 아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제 막 막이 오른 민주화의 무대위에서 각자가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일이다. 선거과정에서 분출된 자유와 평등의 욕구, 그리고 그 엄청난 국민적 에너지를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묶는 책무는 1차적으로 노대통령당선자에게 돌아간다. 그에게 쏟아지는 요구가 다양하고 기대가 큰 것도 그 때문이다.
국민들이 지나치다 싶게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고 열광한 것은 권위주의 체제의 억압에 대한 반항이기도 했지만 그 원인은 정치가 제 구실을 못한데 있다. 결국 좋은 정치란 국민들이 제각기 제자리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신이 나서 하도록 여건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인권이 보장되고 이성과 호양정신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면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외쳐도 국민들은 이를 외면할 것이다. 권력이 정당성과 정통성뿐아니라 도덕적으로 떳떳하다면 아무리 거리로 뛰쳐나가라고 선동해도 선뜻 응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법치주의가 공소한 구호로 전락한 사회는 아무리 경제실적이 휘황찬란해도 안정된 사회는 될수 없다.
한마디로 1987년은 실종된 정치가 복원된 해였다. 모처럼 제자리를 찾은 정치가 경제등 다른 분야와 균형을 취하면서 발전시키는 일이 초미의 과제로 부각되었다.
이런 과제는 비단 정치인들뿐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견인역을 자임해야만 성취된다. 1987년이 한국사의 새장을 여는 계기가 되도록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국민의 손에 달려있다는 자각을 새롭게 해야할 시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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