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국정원 특활비 파문 … 잘못된 관행 바로잡는 계기 삼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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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이 지출 증빙이 필요 없는 특수활동비(특활비)를 청와대에 정기적으로 제공한 사실이 검찰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전달자는 국정원 기조실장을 지냈던 이헌수씨, 받은 쪽은 이른바 문고리 3인방이었던 안봉근·이재만씨라고 한다. 이들에게 지급된 돈의 규모는 매달 1억원씩 4년여간 총 40억원에 이른다. 돈의 출처는 남재준·이병기·이병호씨 등 차례로 그 조직의 수장을 지냈던 국정원장 특활비였다. 특히 청와대 살림을 책임졌던 이재만 전 총무비서관이 ‘박 대통령의 지시로 국정원 돈을 받았다’는 폭탄 진술을 했다고 한다.

이재만 “박근혜 대통령 지시로 받았다” #특활비 사용 자체만으론 죄 묻기 어려워 #국회·국정원 TF팀은 제도 개선 고민해야

검찰은 이를 ‘국정원에 의한 청와대 상납사건’이라거나 ‘직무관련자끼리 금품을 수수한 뇌물사건’으로 규정하고 수사를 확대할 방침이라고 한다. 하지만 검찰 수사는, 예를 들어 ‘국정원 댓글 공작’ 같은 특정한 범죄 혐의를 입증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중간에 단서가 튀어나올 때마다 새로운 사건으로 낙인찍어 다른 범죄 혐의를 씌우는 식의 별건 수사는 특정인을 겨냥한 보복 수사 논란을 부를 수 있다. 검찰은 객관적 증거와 법리적 명징성을 제시해 관련자들의 혐의를 증명해야 할 것이다.

이번 사건을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국정원 특활비의 복잡 미묘한 성격 때문이다. 국정원법에 국정원 예산 전체를 개별 증빙을 요구하지 않는 총액주의를 적용하고, 비밀활동비를 정부 각 부서 예산으로 분산 배치할 수 있게 한 것(12조 1, 2항)은 좌파·우파 정권 가릴 것 없이 국가적으로 그럴 만한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청와대 인사나 청와대가 지정한 인사가 제3국으로 나가 북측 인사를 만나면서 적지 않은 돈을 집어주는 일은 정보사회에선 상식처럼 되어 있다. 이럴 때 청와대가 쓰는 돈은 모두 국정원의 특수활동비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종류의 국익을 위해 공개할 수 없지만 불가피하게 지출해야 하는 정보·공작비는 어느 나라나 국가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투명한 민주 정부를 자임하는 문재인 정권이 2018년 정부 예산안에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4930억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로 잡아 국회 동의를 받겠다고 올린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국정원의 돈이 청와대에 흘러갔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시각은 곤란하다. 그럴 경우 과거 정권 전체에서 벌어졌던 특수활동비 사건을 모두 추적해야 한다는 반론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다만 특수활동비를 둘러싸고 국정원의 부정부패나 개인 비리, 청와대의 권력 남용 가능성은 철저하게 견제·감시돼야 한다. 또한 검찰 수사를 계기로 국회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다각적인 제도적 장치를 논의할 필요가 있다. 국정원 적폐청산 TF팀도 박근혜·이명박 정권의 정치사건에만 몰두하지 말고 특수활동비 관행의 문제점을 조사해 대안을 내놓는 쪽으로 방향을 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