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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한산성’이 실패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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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최민우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장
최민우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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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만 명.

19일 현재 영화 ‘남한산성’의 관객 수다. 추석 연휴 때만 해도 개봉 이틀 만에 100만 명을 돌파해 역대 추석 흥행 신기록 등으로 화제였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원작으로 했고, 이병헌·김윤석·박해일·고수 등 호화 캐스팅에, 강대국에 휘둘리는 현 시국과 맞물린다는 점 등 흥행 요소를 두루 갖추었다는 평가였다. 한국 영화시장의 독특한 흥행 공식인 ‘정치인 관람→코멘트→논란’도 이어졌다. 완성도에 대한 호평마저 잇따라 1000만 명 돌파는 너끈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이제 손익분기점(500만 명)마저 넘기기 어려울 만큼 부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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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실패했을까. 관객 중엔 “국사책을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는 혹평을 내놓는 이가 있다. 한마디로 지루하다는 얘기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의 분석은 이렇다. “김훈의 문학적 문법을 그대로 영상적 언어로 치환했다. 일종의 오마주다. 무엇보다 암울한 역사를 가감 없이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 대중을 불편하게 했다.”

그간 시대상이나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한국 영화가 인기를 끌려면 대략 둘 중 하나는 있어야 했다. 이른바 ‘국뽕’ 애국주의의 촉수를 건드리든지, 아니면 정의로 포장해 공분(公憤)을 일으켜야 했다. 전자의 대표작이 ‘명량’ ‘국제시장’이라면 후자는 ‘베테랑’ ‘내부자들’이다. 특히 후자의 ‘좌파 상업주의’가 대세였다. 이들 영화에선 검찰은 돈만 밝혔고, 재벌은 연애질하느라 바빴으며, 정치인은 뒷거래만 했다. 마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히어로가 악당을 물리치듯 ‘가진 자=악, 못 가진 자=선’이라는 이분법 구도에서 주인공이 기득권층을 후련하게 응징했다. 관객 역시 통쾌함과 동시에 “저런, 나쁜 놈들!” 하는 도덕적 우월감을 확인하곤 했다.

만약 영화 ‘남한산성’이 척화파·주화파 간의 깊이 있는 사상투쟁을 담지 않고 당시 배곯고 아파하는 민초의 생생한 모습을 최대한 부각하면서 ‘병자호란은 복잡하지 않아. 썩은 임금과 조정대신 때문에 치욕을 당한 거야’라는 선명성으로 무장했다면 지금처럼 지리멸렬했을까. 보수-진보로 나뉘어 적대적 공생관계를 형성한 한국적 정치상황이 ‘영화 소비’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다고 하면 과잉해석일까.

최민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