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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정당방위' 공식 깨지나…검찰 이례적 불기소로 관심 집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검찰이 이례적으로 살인 혐의 피의자를 정당방위를 인정해 불기소 처분하면서 ‘정당방위’에 대한 사법적 판단의 변화 가능성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북부지검, 살인 피의자 '정당방위' 불기소 #판례는 "어떤 경우도 살인은 정당화 안돼" #매 맞다 반격한 아내 등도 '유죄' 받아와 #학계선 "검찰 처분으론 부족, 결국 판례가 바뀌어야"

서울북부지검 형사2부(부장 김효붕)는 자신의 집에 침입해 함께 살던 약혼녀를 흉기로 살해한 A씨를 격투 끝에 죽게 한 양모(38)씨를 불기소 처분했다고 지난 11일 밝혔다. 정당방위를 이유로 상대방을 살해한 피의자를 검찰이 불기소 처분하거나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는 일은 한국의 사법 관행상 극히 드문 일이다.

이번 사건과 비견되는 최근 사례는 지난해 5월 대법원이 확정 판결을 낸 ‘빨래 건조대 사건’이다. 2014년 3월 자신의 집에 침입해 물건을 훔치던 절도범을 빨래 건조대 등으로 식물인간 상태에 이를 때까지 폭행해 결국 사망케 한 20대 남성에 대해 대법원은 상해치사 혐의를 인정해 징역 1년6개월의 실형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지난해 자신에게 폭행과 욕설을 퍼붓던 남편을 넥타이로 목 졸라 살해한 40대 여성의 정당방위도 부인하고 살인 혐의로 징역 2년 형을 확정했다. 이 여성은 20년간 계속된 가정폭력의 피해자로 ‘매맞는 아내 증후군’을 겪고 있었다.

먼저 공격하던 상대방에게 반격을 가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에서 그동안 정당방위가 좀처럼 인정되지 않았던 것은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더라도 ‘살인’이라는 결과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관념이 법조인들 사이에 뿌리 깊기 때문이다. ‘매맞는 아내’ 사건의 고법 판결문에도 “가정폭력으로 인해 침해되는 법익이 생명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없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정당방위가 문제가 된 대부분의 판결문에 나오는 문구다.

이같은 관념은 대부분의 사례에서 정당방위 인정요건 중 ‘방위행위의 상당성’을 부정하는 데 작용해 왔다.
형법은 정당방위의 인정요건을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21조 1항)라고 표현하고 있다. ‘침해의 현재성’과 ‘방위행위의 상당성’이 핵심이다.

남자친구와 함께 1992년 자신을 오랫동안 성폭행해 온 의붓아버지를 살해한 ‘김보은 양 사건’이후 법원은 가정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를 살해한 경우 등에서 ‘침해의 현재성’을 다소 넓게 해석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상대방의 폭력이 잠시 중단된 ‘휴지기’도 침해가 계속되는 시간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는 해석이 조금씩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살인’이라는 결과를 두고 ‘방위행위의 상당성’을 인정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대부분 방위행위를 한 사람의 ‘정당성’주장은 양형에서 참작되는 정도에 그쳤던 게 그동안의 재판 결과다.

2015년 9월 살인사건이 벌어진 서울 공릉동 양씨의 자택 주변에 설치됐던 폴리스 라인. [연합뉴스]

2015년 9월 살인사건이 벌어진 서울 공릉동 양씨의 자택 주변에 설치됐던 폴리스 라인. [연합뉴스]

검찰은 왜 양씨의 ‘살인’이 죄가 될 수 없다고 봤을까. 양씨는 약혼녀가 죽어가는 모습을 현장에서 목격했고 A씨는 이어 양씨에게도 흉기를 휘둘렀다. 흉기에 얼굴과 손등을 찔린 양씨는 격투 끝에 흉기를 빼앗아 A씨의 옆구리 등을 찔렀다. A씨에 의한 ‘현저한 침해’가 ‘현재’ 진행 중이었고, 자칫 양씨 자신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검찰 관계자는 “방위행위의 상당성도 인정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판단한 것”이라며 “다양한 외국 사례를 검토하고 최근 변화하는 국민들의 법 감정을 감안한 결정”이라고 말했다.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이주원 교수는 “정당방위를 좁게 인정하는 그동안의 판단 기준으로 보더라도 정당방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며 “검찰의 자체적인 불기소처분은 판례가 아니어서 의미는 제한된다. 법원도 정당방위 인정요건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해 볼 시점이 됐다”고 말했다.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손동권 교수는 "정당방위 인정에 지나치게 소극적이던 판례가 바뀔 때가 됐다"고 지적했다.

임장혁ㆍ문현경 기자 im.janghy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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