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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홍승일의 시시각각

하이닉스의 추억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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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홍승일 수석논설위원

홍승일 수석논설위원

“하이닉스가 망해야 나라가 산다.”

죽을뻔한 하이닉스,도시바도 넘봐 #새정부 ‘재벌=적폐’ 인식 시대착오

특정 민간 기업이 이토록 험한 소리를 들은 경우가 있을까. 2012년 SK에 인수된 하이닉스반도체가 2000년대 초반 정부 고위인사한테서 들은 아픈 이야기다. SK하이닉스가 일본의 반도체 명가 도시바를 품을 가능성이 커졌다는 뉴스를 20일 접하고 문득 떠올린 말이다. 당시 얼마나 천덕꾸러기였으면 그런 소리까지 들었을까.

하이닉스가 10년 주기로 겪은 두 차례의 큰 경영위기 중 첫 번째(1997~2001년) 때였다. 김대중 정부가 주도한 반도체 빅딜로 빚까지 내 LG반도체를 품은 뒤 벼랑끝까지 몰렸다. 2차 경영위기(2007~2009년)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 겪었다. 반도체 경기 사이클의 진폭은 워낙 크지만 하이닉스는 롤러코스터 수준이었다. 수조원의 누적적자로 채권단이 두 손을 번쩍 들었고, 세금인 공적자금이 밑 빠진 독 물 붓기 식이 되자 하이닉스를 ‘스크랩’하라는 여론이 비등했다. 치킨게임에 신물 난 해외 업체들도 “하이닉스가 죽어야 국제 반도체 산업이 산다”고 잔인하게 몰아세웠다.

“궁하면 통한다.”

다른 나라 반도체 업체 같으면 천만의 말씀. 쇠젓가락 쓰는 유일 민족의 반도체 DNA에다 악착같은 헝그리 정신이 합작이 된 2001년의 ‘블루칩 프로젝트’다. 선폭을 80나노에서 70나노로 줄여야 할 판인데 비싼 장비 살 돈이 없어 기존 스캐너를 개조해 썼다. 2004년 ‘300㎜ M10’ 건설은 반도체 역사에 남을 만하다. 1조원 공사 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어 200㎜ 웨이퍼를 생산하던 M5 공장을 다섯 달 만에 개조해 300㎜ 웨이퍼 팹으로 둔갑시켰다.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업계 정설이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려고….”

하이닉스를 살리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정말 많은 이가 울었다. 감원과 내핍을 눈물로 견딘 임직원은 물론이고 채권단과 주주는 모험과 손실을 감내했다. 정부는 해외 매각 또는 스크랩 쪽보다 회생 쪽으로 방향을 틀어 채권단을 압박했다. 반도체 빅딜로 LG반도체를 빼앗긴 LG 총수는 같은 여의도에 있는 전경련 발길을 딱 끊었다. 전경련이 빅딜을 중재했다는 불만이었다. 주 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은 하이닉스를 포함해 현대그룹을 뒷감당하다 골병이 들어 결국 수년 전 하나금융에 인수되고 말았다.

이런 아픔들이 모여 국화꽃은 피었다. 하이닉스는 영업이익 기준으로 불황기인 2001년과 2008년 한 해에 하루 평균 50억원 넘게 까먹었지만 올 2분기 석 달 동안 하루 300억원씩 버는 SK의 황금 캐시카우로 변신했다. 2014년에는 19년 만에 법인세를 납부했고, 그 뒤 국가 세수 기여액은 총 2조3000억원에 이른다.

“하이닉스는 재계 20년사의 만물상.”

흔히 이렇게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대마불사, 부실채권, 기술유출, 구조조정, 무한경쟁, 기술입국, 대기업 빅딜, 기술혁신 등 재계와 금융계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겪은 온갖 부침과 희로애락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 측은 도시바 인수에 대한 언론의 장밋빛 보도를 경계했다. “변수가 많아 가봐야 알아요. 세계를 무대로 싸워야 하고, 한 달이 멀다 하고 하이테크 경쟁을 해야 하고, 긴장을 늦출 틈이 없어요.” 몇 번 죽을 뻔한 기업답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은 박정희 시대의 유산인 재벌에 대한 전면적 개혁을 요구한다”(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달 초 국회 연설)는 말도 나오지만 재벌을 검찰·언론과 함께 3대 적폐 세력의 하나로 규정한 건 시대착오적이다. 대기업이 망해야 나라가 사는 것이 아니라면….

홍승일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