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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례로 본 ‘통상임금’ 3대 궁금증…무조건 ‘신의칙’ 문제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최근 기아차ㆍGM대우ㆍ금호타이어 등 대기업 ‘통상임금’ 판결이 잇따라 나오면서 통상임금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지만 각기 다른 결과로 혼란이 증폭되고 있다.

'통상임금 산입 않겠다' #노·사 간 합의 전제돼야'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은 #'미래' 보다 '현재' 기준 #통상임금 입법 주장 많아 #"편법 쉬워 실효 없다" 우려도

지금도 현대모비스ㆍ대한항공 등 115곳의 100인 이상 기업이 전국 법원에서 소송을 진행 중이다. 통상임금의 개념과 소송의 쟁점으로 떠오른 신의성실 원칙(신의칙) 위반 여부에 대한 궁금증을 최근 판례를 통해 짚어봤다.


◇경영위기 기업의 “신의칙 위반” 주장은 무조건 인정되나

지난 4일 한국GM 사무직 근로자 등 1482명은 회사를 상대로 낸 90억 규모의 통상임금 소송에서 이겼다. ‘업적 연봉’이 통상임금에 해당하는 지가 소송의 쟁점이었다. 업적 연봉은 전년도 평가를 기준으로 다음 해 차등 지급되는 돈으로 생산직 근로자들의 ‘상여금’과 비슷한 개념이다.

재판에서 한국GM 측은 "근로자들의 청구는 신의칙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신의칙은 ‘계약 당사자들은 서로 이익을 배려해야 하고, 형평성에 어긋나거나 신뢰를 저버리면서까지 권리를 행사해선 안 된다’는 민사법상 대원칙이다. 신의칙 적용의 대전제는 상호 간 신뢰를 형성할 만한 '약속' 또는 '합의'의 존재다.

부평 한국GM 공장. [연합뉴스]

부평 한국GM 공장. [연합뉴스]

한국GM 측은 2013년 갑을오토텍 정기상여금 사건에서 신의칙을 이유로 근로자의 청구를 기각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근거로 내세웠다. 당시 대법원은 “노ㆍ사가 통상임금 산정 기준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한 금액을 법적 사유를 들어 지급하라고 한다면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이 우려되기 때문에 용인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한국GM은 GM 본사가 한국의 인건비 부담을 이유로 추가 물량 배정을 거부하는 등의 경영상 어려움을 강조했다.

그러나 서울고법 민사합의1부(부장 김상환)는 신의칙이 쟁점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신의칙 적용의 전제가 되는 ‘통상임금 제외 합의’가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임금협상을 한) 노조는 주로 생산직 근로자로 구성됐고, 최근 노조에 가입한 사무직 근로자들은 집단적으로 회사와 합의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경영상 어려움’ 은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판단하나

‘노사의 사전 합의’라는 전제가 충족되더라도 사측은 ‘경영상 중대한 어려움’을 입증해야 한다. 판결마다 차이는 있지만 주로 ‘미래 전망’보다 ‘현재 상태’가 재판부의 판단 지표가 된다.

지난달 31일 선고된 기아차 사건에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1부(부장 권혁중)는 신의칙 위반이 아니라고 판단한 배경을 설명하며 “가정적인 결과를 예측해 근로기준법상 정당한 권리 행사를 제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100% 미만의 부채비율과 아직 흑자인 상태, 그동안의 성과급 지급 등이 기아차 측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사측은 “한ㆍ중 사드(THAAD) 갈등과 미국 보호무역 등의 추세가 계속돼 심각한 경영난에 시달릴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아차 통상임금 관련 1심 선고가 내려진 서울중앙지법에서 기아차노조원들이 해산하기 전 박수를 치고 있다. 강정현 기자

기아차 통상임금 관련 1심 선고가 내려진 서울중앙지법에서 기아차노조원들이 해산하기 전 박수를 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지난달 18일 금호타이어 사건 항소심 판결에선 금호타이어의 부채가 4조원에 달한다는 점(지난해 6월 기준) 등이 회사 측의 신의칙 주장을 받아들인 주요 근거가 됐다. 조선업계 불황으로 경영이 어려워진 현대중공업의 신의칙 주장도 지난해 항소심에서 받아들여졌다.

이에 대해 학계에선 “모든 기업이 언제 위기가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근로자 권리를 중요하게 봐야한다(노상헌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기업이 전략을 짤 때 5년 이상 내다봐야하는데 미래의 위험을 배제하는 것은 근시안적 판단(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 등 의견이 엇갈린다.


◇매년 주는 김장비도 통상 임금인가 

대부분의 소송은 신의칙 위반 여부를 따지기 전에 어떤 명목의 급여가 통상임금에 해당하는지를 두고 다투는 것으로 끝난다. 대법원은 2013년 통상임금의 개념적 징표를 ‘모든 근로자에게(일률성) 일정한 기간마다(정기성) 어떤 날에 일해도 지급(고정성)돼야 한다’고 구체화했다.

3가지 기준 중에는  ‘고정성’을 만족시키지 못해 통상임금으로 인정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갑을오토텍 사건에서도 ‘김장 보너스’는 지급 시점에 재직하는 근로자에게만 지급됐기 때문에 통상임금이 아니라고 판단됐다. 백화명 법무법인 민주 변호사는 “김장비 지급 전에 퇴직한 근로자에게도 근무일수에 비례해서 지급됐다면 통상임금에 해당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갑을오토텍 전경. [중앙포토]

갑을오토텍 전경. [중앙포토]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일 “통상임금 범위를 명확히 하도록 근로기준법을 개정하겠다”고 공언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중앙포토]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중앙포토]

이에 대한 법조계 판단은 갈린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통상임금 기준을 법제화해 소모적인 소송과 혼란을 방지해야한다”고 말했다. 김진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는 “수당을 지금할 때마다 이름을 바꾸는 등 법에 명시된 내용만 피하려는 편법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어떤 입법도 실효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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