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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개 캔버스에 내려앉은 그날 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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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광장에, 서’, 2017, 캔버스에 혼합, 360×1620㎝.[사진 가나아트센터]

‘광장에, 서’, 2017, 캔버스에 혼합, 360×1620㎝.[사진 가나아트센터]

흙으로 그림을 그렸다. 흙에 지푸라기를 섞어서도 그렸다. 꽃씨로 그린 그림도 있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 ‘바람 일다’를 통해 선보이는 임옥상(67) 작가의 여러 신작은 아주 가까운 현대사의 사건을 담은 장면과 더불어 자연의 재료, 특히 땅의 재료에 한껏 다가간 기법이 두드러진다.

임옥상 개인전 ‘바람 일다’ #가로 16m 넘는 초대형 ‘광장에, 서’ #그림에 흙·지푸라기·꽃씨 활용 #국내외 정치인들 가면도 내걸어

그 중 ‘광장에, 서’는 가로 16m가 넘는 초대형 작품이다. 광화문 촛불 시위의 다양한 장면을 108개의 작은 캔버스에 각각 그려 하나로 연결했다. 부조처럼 땅에 그린 듯한 각각의 그림 위에 밝게 채색된 둥근 원이 겹쳐져 촛불의 리듬감까지 담아냈다. 청와대 뒤편 산세를 그리고 그 아래에 각각 흰색과 분홍색을 송이송이 꽃밭처럼 펼쳐놓은 ‘여기, 흰꽃’과 ‘여기, 무릉도원’도 흙으로 그린 그림이다. 흙의 입체적 질감 자체로 산세를 빚은 효과가 한결 돋보인다.

작가는 “우리는 다 땅 위의 존재인데 사람들이 아닌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시에 살며 점점 땅을, 흙을 밟지 못하고 흙의 정신을 잊으면 정말 삭막할 수밖에 없지요. 흙과 친할 수 있는 세상으로 문명의 방향이 옮겨가야죠. 흙을 제일 잘 느낄 수 있는 방법은 농사라고 생각해요. 생명을 직접 기르고 보람을 느낄 수 있다면 세상이 나아지지 않을까합니다.”

땅이나 흙은 그의 작품에서 낯익은 상징과 소재 중 하나다. 90년대 중반 개인전 ‘일어서는 땅’ 때는 전시장 바닥에서 흙을 펼쳐놓고 관람객에게 맨발로 디뎌보기를 권했다. “다들 맨발로 들어올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흙은 거칠죠. 그런 흙의 몸과 나의 몸이 일체가 되어 작업하면서 오는 환희가 있습니다.” 나아가 그는 유교에서 인간의 본성을 이르는 사단칠정 가운데 “사단의 모든 것을 다 갖고 있는 게 흙”이라고 했다. 물론 흙을 쓰는 건 그래서만은 아니다. “굳은 다음에도 물을 뿌리면서 파고 메꾸고 붙이고 이런 작업이 가능하거든요. 조형적으로 광장히 여러가지 속성을 활용할 수 있어요. 땅에 그리는 것처럼 할 수도 있고.” 그는 종이를 적절히 섞어 무게를 줄이고 균열을 막는 방법을 통해 흙을 회화의 주재료로 만들었다.

‘가면무도회’, 2017, 혼합재료. [사진 가나아트센터]

‘가면무도회’, 2017, 혼합재료. [사진 가나아트센터]

초상화 ‘윌리엄 모리스’와 존 버거‘도 눈에 띄는 작품이다. 흙에 지푸라기를 섞어 그린 덕에 새로운 질감이 생생하다. 낯익은 얼굴이 잔뜩 등장하는 ‘가면무도회’는 그 자체로 강렬한 작품이다. 이승만에서 문재인까지, 김일성에서 김정은까지 남북한 역대 지도자와 미국 트럼프 대통령, 일본 아베 총리 등 모두 14명의 얼굴을 우레탄폼과 종이를 이용해 대형 가면으로 만든 것이자 장차 국내외 100여 명 규모로 완성할 작품이다. 흥미로운 건 대상이 확장된 과정이다. 시작은 2015년 무렵이다. 정부가 시위대의 복면 사용을 불법으로 몰자 작가는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얼굴을 큼직한 종이 가면으로 만들어 시위에 들고 나갔단다. 이어 “외로울 것 같아” 검은 선글라스를 쓴 박정희 전 대통령 가면도 만들었다. 그리고는 혹시나 하는 “자기검열”과 “알리바이”를 거쳐 여러 인물 가면을 만들게 됐다고 솔직하게 들려준다.

그는 촛불 이후 새 정부가 출범한 지금 시대에 대해 “예술가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다” “권력은 고삐를 쥐지 않으면 제맘대로 튄다”라며 비판적 태세를 확실히 했다. “연은 연줄이 있어서 높이 나는 겁니다. 사람들이 연줄이 없으면 멀리 갈거라고 생각하는 것과 달라요.” 이번 전시는 9월 17일까지.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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