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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보 보장성 강화, ‘中복지’엔 ‘中부담’이 정공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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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4호 02면

사설

나흘 전 정부가 발표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방안을 두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내용이 파격적인 데다 31조원이라는 큰돈이 들어가는 걸 두고 다양한 평가가 나온다. “방향을 잘 잡았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 그런가 하면 일각에서는 보장성 목표치 70%가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자유한국당은 “장밋빛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평가절하한다.

정부 발표를 요약하면 2022년 현 정부 임기까지 5년 동안 30조6000억원을 투자해 진료비의 70%를 건강보험이 커버하도록 보장률(현재 63%)을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3800개의 비급여 진료를 급여화하고, 노인·어린이 진료비 부담을 완화하며, 저소득층 의료비를 대폭 줄이려 한다. 비급여 진료비는 한국 의료의 암과 같은 존재다. 잡으려고 쫓아가도 신기루처럼 달아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의료보장률(81%)에 약 20%포인트 차이가 난다. 조금씩 비급여를 줄이려고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이번 정부가 3800개의 비급여 진료를 일괄적으로 급여화해서 50, 70, 90%를 환자가 부담하는 ‘예비 급여’를 도입한 게 묘수다. 이렇게라도 해서 일제 정리하는 게 바림직하다. 대신 의학적으로 필요성이 높은 것만 급여화해야 한다.

이번 대책을 시행하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예상된다. 비급여 진료비가 큰 병원으로 환자가 몰리는 것을 막았는데 이게 사라지거나 줄어들면 서울의 대형병원 쏠림이 심해질 수 있다. 또 의료기관이 수입 감소를 벌충하기 위해 의료 행위량을 늘릴 수 있다. 새로운 비급여를 창출할 수도 있다. 이런 부작용을 면밀히 살피려면 속도를 조금씩 늦추면서 빈틈을 메우는 게 상책이다.

이번 대책을 그대로 시행하면 의료기관 경영이 어려워진다. 지금도 수가가 원가에 못 미친다. 비보험 진료는 이를 만회하는 데 기여했다. 정부도 은연중에 용인했다. 김광림 자유한국당 정책위의장 권한대행은“의료기관의 3분의 1이 문을 닫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이런 점을 우려해 적정 수가 보장을 약속했다. 정부도 의료계가 더 들썩이기 전에 “지금보다 병원 수익이 줄어들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기존 의료행위 중 원가에 못 미치는 것은 이번 기회에 바로잡고 가는 게 맞다. 의료계도 마냥 반대해서는 곤란하다. 비급여 진료 때문에 국민들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 것이다. 국민을 위해 정부와 머리를 맞대 ‘윈-윈’ 대안을 찾아야 한다. 반대만 하다가는 역풍을 피할 길이 없게 된다.

돈이 더 문제다. 31조원을 조달하느라 건보 누적적립금 21조원을 다 까먹지 않을지 걱정이다. 이 돈은 2003년 건보 재정 안정화 대책 이후 여러 정부를 거치면서 아낀 돈이다. 이 정부가 다 쓸 자격이 없다. 계획대로 절반을 다음 정부로 넘겨주려면 보험료를 차질 없이 올려야 한다. 사회보험 혜택은 공평한 부담에서 나온다. 18일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내년 건보료 인상률을 결정하는데, 이날 회의가 시금석이 될 것이다. 올해처럼 동결하거나 2013~2016년처럼 1%대에서 올리면 보장성 강화가 공염불이 될 공산이 크다.

이번 대책에다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 때문에 다음 정부 첫해인 2023년 이후 매년 10조원 이상이 새로 들어간다. 게다가 저출산·고령화 때문에 건보 재정 여건은 더 나빠질 것이다. 기획재정부는 3월 건강보험이 2018년 당기 적자, 2023년 누적 적자로 돌아설 것이라 추정했다. 다소 과장이 있다고 해도 추세가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현 정부는 기초수급자 확대에 약 10조원, 기초연금 인상에 약 22조원, 아동수당 도입에 13조원 등 거액이 들어가는 복지 정책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국공립 어린이집 확대, 치매 국가 보장, 최저임금 인상분 보전 등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고소득층 증세만으로 어떻게 감당할지 걱정이 앞선다. 문재인 대통령은 “건전 재정을 유지하면서 감당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했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국민은 불안하기 그지없다. 부분 증세로 안 되면 보편적 증세도 검토해야 한다. 복지를 대폭 늘려 ‘중(中) 복지’로 가려면 재원도 ‘중(中) 부담’으로 가는 게 정공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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