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설악에 살다] (50) 울산암의 불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또 올라온 오후반 수학여행객들이 산을 내려갈 때까지 나와 안중국씨는 바위 속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결국 울산암 바위에서 비박(비상노숙)하게 됐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다. 엎어진 설악의 검은 실루엣만 밤 하늘에 선명히 그려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대청봉에서 중청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말안장 같다. 그래서 '안부(鞍部.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우묵한 곳)'라는 말이 생겨났나 보다. 그 안부에 안장을 얹어 동해나 하늘로 신나게 달려보고 싶어졌다.

별들이 몇 개씩 돋아났다. 시리우스가 보이고 오리온이 차츰차츰 그 밝기를 더해가더니 설악의 밤하늘은 온통 별들의 축제 마당이 됐다. 그 별빛을 따라 정신이 또렷해질 뿐, 도무지 잠은 오지 않았다.

무당들의 행렬인지 내원암에서 신흥사로 내려가는 계곡에 등잔불이 길게 이어졌다. 무리지어 흔들거리며 신흥사 쪽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등잔불들이 꼭 불뱀 같았다.

도봉산 선인봉이나 북한산 인수봉의 밤은 스모그에 찌든 별빛보다 발 아래로 깔리는 서울시가지의 불빛이 더 황홀했었다. 산정의 적막함과 도시의 현란함이 극단적으로 대비돼서인지, 아니면 산쟁이의 남모를 소외감 탓인지 서울시가지의 불빛을 바라볼 때마다 생각에 잠기곤 했다.

미아리고개에서 수유리로 뻗은 길을 내달리는 자동차 불빛의 긴 행렬을 바라보다가 나는 곁에 있던 자일파트너에게 "어느 시인이 저걸 불뱀이라 했지"라며 그럴듯하게 분위기를 잡은 적이 있다.

그 뒤 몇 년 지나 연세대 산악회 후배인 대학생들과 인수봉을 오르던 어느 날 밤, 한 3학년생이 꼭 내가 했던 말투로 옆에 있는 그의 후배에게 "얘, 어느 시인이 저걸 불뱀이라 했어"라며 으스대는 게 아닌가. 내 입에서 나온 그 불뱀 얘기는 모교 산악회에 쭉 전해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형, 어느 시인이 저것을 불뱀이라 했지요."

함께 비박하던 안씨가 그 불뱀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봉산 선인봉에서 태어난 불뱀은 이산 저산을 떠돌다가 울산암에 이르러 후배 입에서 나와 내 귀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기까지 몇 년이 흘렀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또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 행렬이 정말 불뱀 같은가 하는 것도 문제가 안 된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기계에서 나온 불빛마저 불뱀으로 받아들이는 산쟁이의 시선이자 감성이다. 비박하는 산쟁이는 사랑에 빠진 연인들처럼 이미 시인인 것이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어느 날, 눈덮인 백두산을 바라보며 이런 시를 읊었다.

"보름달빛에 무게를 잃은 백두산이 구름을 타고 마냥 흘러갑니다/ 졸망졸망한 자식 같은 산자락을 떼어놓고/ 조강지처 같이 푸근한 떡갈나무숲마저 버리고/ 떠도는 자의 영혼을 닮은 떠도는 산은 만년으로도 녹지 않는 고독에 떠밀려 밤하늘을 마냥 흘러갑니다/ 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쓸쓸함으로 밤하늘을 떠도는 하얀 산도 떠도는 자의 영혼처럼 누군가에게서 용서받고 싶은가 봅니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