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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ARF 데자뷔와 강경화 외교장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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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수정
김수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수정 라이팅에디터·외교안보선임기자

김수정 라이팅에디터·외교안보선임기자

“가서 그에게 내가 이곳에 있다고 귀띔하라.” 여기에서 ‘나’는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고 ‘그’는 백남순 북한 외무상, ‘이곳’은 브루나이 수도 반다르스리브가완의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회의장 라운지다. 2002년 7월 31일 파월은 국무부의 에드워드 동 한국과장을 통해 백 외무상과의 15분 조우(遭遇)를 이렇게 ‘기획’했다.

남북 대화에 너무 집착하면 북핵 위기 본질 흐려 #울림 큰 연설로 담백한 마닐라 외교 퍼포먼스 기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6개월 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북한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만남. ‘나쁜 짓’을 지속하는 상대에게 대화를 공식 제안하는 건 ‘선물’을 주는 행위라는 외교 상식을 거스르지 않기 위한 아이디어였다. 그나마 며칠 전 북한이 서해 연평도 도발(6·29 서해교전)에 유감을 표명하는 등의 긍정적 조치를 했기에 가능했다. 이 조우 이후 미국의 특사가 평양을 방문함으로써 북·미 관계의 대전기가 마련될 듯했지만, 북한의 우라늄 핵 개발 계획 시인으로 정세는 다시 급경직됐고 그렇게 15년이 흘렀다.

올해 ARF가 다음달 7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다. ARF는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10개국을 중심으로 한·미·일·중·러·북 등이 참여하는 다자 안보협의체이지만 북핵과 남중국해 이슈를 둘러싼 미·중의 외교 전쟁터로 주목받는다. 미국은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4형 발사 이후 이번 마닐라 회의를 벼르는 분위기다. 북한과 거래하는 중국의 기업을 겨냥한 세컨더리 제재로 중국 압박을 강화할 게 분명한 가운데 북한을 국제사회에서 떼어 놓는 본보기로 이번 ARF를 보고 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미국이 의장국인 필리핀과 회원국들에 북한이 ARF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할 것을 비공식 요구했다고 27일 보도했다.

북한은 핵 도발의 장본인이지만 역설적으로 ARF에선 ‘귀한 손님’ 대접을 받았다. 지난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직후 외교 해빙 기류 속에 북한이 방콕 회의에 참석하면서 사상 첫 남북 외교장관(이정빈-백남순) 회담이 이뤄졌다. 이후 북한 외무상의 참석 여부, 남북 회담 성사 여부는 회의의 스포트라이트(적어도 한국 언론에는)가 됐고, 흥행을 좌우하기도 했다. 북한은 이를 핵 개발 당위성을 선전하는 장으로 활용해 왔다. 이용호 외무상이 참석한다면 올해도 그 판은 재연될 것이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이 외무상과의 회동에 대해 “전향적으로 검토하려 한다. 제안했는데 거절당하면 모양새가 좋지 않아 조심스럽고 자연스럽게 추진해 보려고 한다”고 했다. 파월식 조우가 떠오른다. 문재인 대통령의 신베를린 구상 발표, 취임 후 네 차례나 반복된 평창 겨울올림픽 참가 요청, 국방·통일부의 군사당국자회담 및 적십자회담 제안 등 정부의 쉼 없는 대북 대화 제안 기조에 부응하는 언급이었을 게다.

하지만 이번 ARF는 다르다. 북한의 핵·미사일 시계가 빨라졌다. 북한 말대로 동아시아 역학 구도를 바꿔 놓는 시점이다. 북핵을 둘러싼 국제사회의 제재, 그리고 각기 셈법이 다른 미·중·일·러의 각축전이 더 세질 게 분명하다. 이용호는 2000년 이후 ARF에 거의 참석한, 서양 문화에 익숙한 외교관이다. 회의장에서 강 장관에게 웃으며 악수를 건넬 수 있다. 강 장관은 그 정도에서 만족했으면 한다. 한국 정부가 이미 어떤 상황이 와도 북한과 대화하겠다고 수차례 밝힌 상황에서 북한이 핵 포기와 도발 중지 등 유의미한 의제로 대화에 나설 이유가 있겠는가 말이다.

이번 ARF는 강 장관의 외교 역량을 시험할 첫 무대다. 강 장관이 회의장에서 북한이 핵·미사일 없이 새 세상을 맞을 수 있음을 역설하는, 역사에 남을 연설을 했으면 좋겠다. 2005년 강 장관이 국제기구정책관으로 일할 때 외교부를 출입했다. 그는 쿨했다. 현안이 기사화되는 것을 피하려 이리저리 꼬지 않았다. 이슈를 정확히 설명하고 협조를 청할 것은 청했다. “남성 외교관들보다 낫다”고들 했다. 북핵을 직접 다루진 않았지만 위기의 본질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강 장관의 담백한 마닐라 퍼포먼스를 기대한다.

김수정 라이팅에디터 겸 외교안보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