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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찬호의 시시각각

‘한·미·일 공조’ 미스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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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지난달 30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최대의 미스터리는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에 문재인 대통령이 합의해준 것이다. 문 대통령은 6일 뒤 베를린에서 트럼프 대통령,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한·미·일 정상회담을 가져 그 합의를 재확인했다. 숙원을 성취한 워싱턴은 입이 귀에 걸렸고, 베이징은 경악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다.

외교부담 커 보수 정부도 꺼린 이슈 #진정성 있는 동맹 관리로 돌파해야

한·미·일 공조는 미국이 틈만 나면 한국에 요구해온 핵심 이슈였다. 하지만 한국은 보수정권조차 3국 공조를 꺼렸다. 이명박 정부 때다. 미국이 “남중국해 문제와 관련해 한·미·일 공조를 선언하자”고 요청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중국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수 있다”는 외교부 주장을 받아들여 “남중국해 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한다”는 입장을 표하는 선에 그쳤다. 박근혜 정부 역시 한·미·일 공조를 공공연히 못 박는 건 극구 꺼렸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반일의식이 강하고, “한·미·일이 뭉치면 북·중·러가 뭉쳐 신냉전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주장해온 문재인 정부 사람들이 한·미·일 공조에 합의했으니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다. 정부 관계자들은 “한·미·일 공조는 ‘북핵’에만 국한되는 얘기”라고 해명한다. 그러나 중국의 의구심을 해소하기엔 턱도 없다. 한·미 정상회담 성명에 “두 정상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법에 기반한 질서’를 지지하고 수호하기 위해 함께 노력할 것임을 확인하였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국제법을 위반하며 남중국해에서 힘을 확장하고 있는 중국에 한·미·일이 공동 대응할 뜻을 시사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중국은 두고두고 이 대목을 문제 삼으며 우리를 압박할 것이다. 미국도 이 문구를 명분 삼아 남중국해 문제에서 한국이 확실히 미국 편에 서줄 것을 요구할 공산이 크다. 한국으로선 아주 어려운 처지가 된 셈이다.

문재인 정부도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왜 덥석 한·미·일 공조에 합의해줬을까? 청와대에 포진한 대통령 측근들은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열린 대책회의에서 한·미·일 공조 방안에 반대했다. 그러나 국가안보실이 “미국의 요구가 워낙 강력하다”며 밀어붙여 한·미·일 공조가 성사됐다는 것이다.

왜 그래야 했을까? 트럼프가 내일이라도 북한을 칠지 모르니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포비아’에다 사드 조기 배치 합의를 뒤집은 데 따른 부담, 그리고 미국의 동의를 얻어 남북대화를 재개하겠다는 열망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을 것이다. 정부가 내세우는 ‘한·미 정상회담의 성과’들을 봐도 그렇다. 북핵은 전쟁 아닌 대화로 풀고, 대화의 주도권은 서울이 쥐기로 한·미가 합의했다는 게 대표적 성과다. “평화를 얻으려고 한·미·일 공조를 내준 것”이란 해석을 가능케 한다.

한국이 미국에 통 큰 양보를 해준 경우는 의외로 진보 정부 때가 많다. 노무현 정부는 베트남전쟁 이래 가장 많은 병력을 보낸 이라크 파병을 비롯해 세계 최대 규모인 평택 미군기지 건설 같은, 보수 정부도 주기 힘든 선물들을 미국에 안겨줬다.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한·미 동맹을 벗어나 ‘자주적’ 노선을 추구하다 보니 미국의 막대한 압박에 직면했고, 이를 상쇄하기 위해 워싱턴의 핵심 요구를 들어주는 행태가 반복됐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그런 실패를 피하기 위해 한·미 동맹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명한 선택이다. 하지만 말로만 동맹을 강조하면서 행동은 북한이나 중국에 기운다면 결국엔 노무현 정부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결론은 하나다. 동맹에 진정성을 보이라. 대화에 들이는 노력만큼 제재에도 힘을 실어라. 그러면 안 줘도 되는 선물을 미국에 줘야 하는 부담을 피할 수 있다.

강찬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