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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부자 증세’보다 ‘국민 증세’할 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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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누구나 세금을 싫어한다. 오죽 싫으면 살면서 결코 피할 수 없는 두 가지로 ‘죽음과 세금’이 꼽히겠나. 어느 권력도 함부로 증세를 입에 담지 않았다. 잘못하면 한 번에 정권이 훅 갈 수 있어서다. 사례는 차고 넘친다. 서슬 퍼런 군부 정권도 예외가 아니었다. 1977년 시행된 10%의 부가가치세는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앞당기는 인화제가 됐다. 86년엔 ‘재산세 파동’으로 정석모 내무부 장관이 옷을 벗었다. 건물 과표와 세율을 조금 올렸는데도 당시 여당인 민정당까지 나서서 아우성을 쳤다. ‘장바구니세’ 또는 ‘주부세’로 불리는 보유세는 특히 민감한 세금이다. 노무현 정부가 종합부동산세를 내놨다가 국민적 저항을 부른 이유다.

효율 해치지 않는 분배 #명품 좌파만 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누구보다 증세의 무서움을 잘 안다. 그가 대선 내내 증세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한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사실상 분배의 다른 이름인 ‘소득 주도 성장’을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재원 조달에 대해 물으면 에둘러 피해갔다. 3% 정도였던 재정 지출 증가율을 7%로 늘리겠다, 아동·청년·노인 수당 등에 178조원의 돈을 추가로 쓰겠다고 했지만 ‘어떻게’는 내놓지 않았다. 당시 대선 캠프 인사는 “답은 증세밖에 없다”며 하지만 “섣불리 증세를 말했다가 화를 부를 수 있다”며 입을 다물었다. “집권 후 차근차근 전략을 세우기로 가닥을 잡았다”는 것이다.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적어도 올해는 세율 인상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한 것도 정권의 그런 생각을 읽고 정무적 판단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주말 난데없이 튀어나온 ‘부자 증세’는 그런 만큼 뜻밖이다. 왜 지금 갑자기 증세인가. 해석은 크게 셋이다. ①지지율이 높을 때 정면 돌파를 택했다 ②초대기업·초고소득자에 대한 ‘핀셋 증세’이니 국민 반발이 크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③편가르기 효과에 따른 지지층 결집이 정권에 나쁘지 않다고 봤을 것이다. 이 셋을 다 고려했을 수 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여당은 즉각 ‘명예과세’ ‘존경과세’라며 프레임 전쟁에 나섰다. 대통령은 “임기 5년 동안 서민 증세는 없다”며 화답했다.

그래도 계산이 잘 안 맞는다. 부자 증세로는 고작(?) 연 4조원 정도 세수를 늘릴 뿐이다. 178조원의 공약 재원 마련은 물론 ‘중(中)부담-중(中)복지’로 가기에도 많이 부족하다. 자칫 심각한 조세 저항을 부를 수 있다. 이미 종부세 때 익히 경험한 바다. 명예니 존경이니 이름 붙여봐야 헛일이다. 원치 않는 세금을 내면서 그런 사탕 발림에 누가 넘어가겠나. 부자의 세금만 명예롭고 존경받아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금액은 적어도 중산층의 세금이 더 명예로울 수 있다.

그러니 다른 상상을 하게 된다. 혹시 ‘국민 증세’로 가는 수순이 아닐까. 중부담 중복지엔 국민 증세가 필수다. 부자 먼저 세금을 물리면 중산층 설득이 쉬워진다. 국민 증세야말로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대통령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문 대통령은 최저임금 인상, 탈원전, 비정규직 철폐 등 분배의 외연을 넓히고 국민 부담을 늘리는 정책들을 강력히 밀어붙였다. 이런 정책들은 인센티브 효과를 왜곡시켜 효율을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효율을 희생시켜 평등과 분배를 이뤄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다. 명품 좌파라면 한걸음 더 나가야 한다. 효율을 덜 희생시키면서 분배를 강화하는 방안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공정한 국민 증세가 그중 하나다.

다음주면 새 정부의 첫 세제 개편안이 발표된다. 여기에 ‘국민 증세’ 방안이 꼭 담겨 있기 바란다. 5년 후 무지막지한 청구서가 날아올 텐데, 아무 대책도 없이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잖은가.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