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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익는 마을...깊어 가는 시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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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익어가는 향기가 그윽한 충남 천안시 입장면 신두리.권혁준씨(40.두레양조 대표)가 포도주공장을 세우고 있는 곳이다.이 공장은 한국-칠레 자유무역협정(FTA) 시대를 앞두고 이 고장 포도농가들의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빠르면 올 연말부터 여기서 재배된 포도로 만든 증류포도주가 이 공장에서 출시될 예정이다.


권씨가 법인을 설립한 것은 협상이 타결되기 2년전인 2000년 초였다.당시엔 이미 농산물시장 개방으로 포도 출하가격이 바닥을 치닫고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잉생산으로 제값을 받기가 더욱 어려워지자 권씨는 가공산업쪽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설령 FTA가 국회에서 비준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포도농가로서는 활로를 찾기위해 포도주 가공산업이든 수출이든 자구책을 찾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권씨는 "FTA 가 국회에서 비준되면 전국 최대규모의 거봉포도 산지로 유명한 이 고장의 농민들은 '직격탄'을 맞을지도 모른다"고 했다.마을 곳곳에 걸려있는 '자유무역협정 비준 절대반대'라는 현수막에는 자못 비장함이 묻어 나고 있었다.

본격적인 노지 포도 수확철을 앞두고 있는 농민들의 표정도 그다지 밝지가 않다.권씨는 "노지 포도가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는 않겠지만 시설 포도 재배 농가들이 노지 포도나 사과.배와 같은 다른 작물로 전환한다면 연쇄적인 피해가 불가피 할 것"이라고 말했다.

9월부터 본격 출하되는 노지 포도의 시판가는 1kg에 2천2백원(이하 최근 4년 평균가격) 수준. 1kg 에 3천원 가량하는 칠레산은 11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수입되기 때문에 설사 출하시기가 겹친다해도 현재 45.5%에 달하는 계절관세를 감안하면 앞으로도 국산 노지 포도의 가격경쟁력은 일정기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설 포도의 가격은 1kg에 평균 4천2백원으로 칠레산이 출하되는 시기와 겹치는데다 관세까지 없어지면 경쟁력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국내 시설 포도 생산량은 전체의 5%에 달하는 연간 2만톤 가량이다.

> 한 연구에 따르면 한.칠레 FTA가 발효될 경우 시설 포도원을 중심으로 전체 4천농가중 1천농가 정도가 경작을 포기할 것으로 조사됐다.정부는 이들 포도농가에 대해 3백평당 1천만원씩 3백33억원을 보상 지원할 것으로 알려졌다.

권씨는 "농민들이 납득할 만한 수준의 보상이 없고서는 FTA를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한다.정부는 향후 7년동안 총 8천억원 규모의 기금을 조성해 농민들을 지원할 계획이다.권씨는 "직접적인 피해 이외에 작목전환 등으로 일어나는 간접 피해에 대해서도 농민들과의 광범위한 보상합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비준이 안되기만을 앉아서 기다릴 수야 없지 않냐"는 것이 권씨의 생각이다.권씨가 지적하는 포도농가의 최대 문제는 과잉생산이다.국내에선 연간 43만톤이 생산돼 1인당 10kg을 소비해야한다.일본의 경우 21만톤으로 1인당 2kg에 불과하다.

일본서 거봉 포도가 1kg에 8천엔(약 8만원)으로 거래되는 것은 자국산 생산량이 적정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권씨는 분석한다.일부에서는 이번 FTA가 국내 생산량 구조조정에 나름대로 일정한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전망도 나오고 있다.

권씨는 "양질의 포도를 적정량만 생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본 시장 등에 적극적으로 수출을 할 수 있도록 유관단체들이 힘을 합쳐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그는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농협이 생산자를 위한 서비스 조직으로 탈바꿈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농업회사법인 형태로 운영될 권씨의 포도주회사의 성패는 이 고장의 포도산업을 좌우할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다.권씨는 질좋은 포도주 생산을 위해 프랑스와 독일을 직접 방문해 기술을 배웠다.그는 중앙대에서 개설한 소믈리에(와인담당 웨이터라는 뜻) 과정에도 등록해 소비와 유통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노우하우를 익혔다.

권씨는 "국내 수입 포도주 시장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지만 가격이 비싸 선뜻 마시지 못하는 소비자들이 많다"며 "저렴한 가격과 좋은 품질로 승부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자신한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란?

FTA란 둘 이상의 국가에서 상품이나 서비스를 사고 팔 때 관세.비관세 장벽을 철폐하는 협정으로 FTA를 맺은 나라끼리는 자기 나라처럼 상품 등을 사고 팔 수 있게 된다.한국과 칠레는 1998년부터 FTA를 추진키로 합의한 후 5년만인 지난해 10월25일 협상을 타결했다.올해 2월15일 두 나라는 협정에 공식 서명했으며 국회 비준 절차만을 남겨두고 있다.비준이 되면 30일 이후부터 공식발효 된다.농민단체 등의 반대로 그동안 여러차례 국회 비준이 성사되지 않았으나 다음달 정기국회에 법안이 제출된 상태다.

양국 FTA는 서로 민감한 품목인 칠레산 사과.배와 한국산 냉장고.세탁기를 맞바꿔 협정에서 제외하는 방식으로 타결됐다.

우리가 수입하는 전체 1만1천1백70개 품목 중 21개 품목(0.2%)을 협정에서 예외로 한 반면 칠레가 수입하는 5천8백54개 품목 중에선 54개 품목(0.9%)을 예외로 했다.협정 체결로 앞으로 칠레와의 교역이 5~10%, 장기적으로는 20% 이상 늘 것으로 전문연구기관들은 보고 있다.

공산품의 경우 승용차.휴대전화.컴퓨터 등 대(對)칠레 수출의 66%를 차지하는 품목이 협정발효 즉시 관세(평균 6%)가 철폐된다.

반면 국내 농업은 상당한 타격을 받을 전망이다.복숭아.포도.돼지고기 등 상당수 농산물이 관세율이 점점 낮아지다 결국 없어지게 돼 있어 장기적으로는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천안 입장=한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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