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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돼지를 위한 변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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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강원도 원주시에 돼지문화원이 있다. 지난 40년간 돼지와 함께해 온 장성훈(56) 대표가 운영하는 곳이다. 그는 현재 돼지 2만여 마리를 키우고 있다. 그에게 “사람과 돼지 사이에 감정이 통할 수 있나”라고 물었다. 대답은 명료했다. “당연하죠.” 예컨대 사람만 보면 도망가는 돼지가 있다. “직원들을 불러놓고 ‘때렸지’라고 확인합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똑같습니다. 관심을 먹고 자랍니다.”

장 대표는 딱히 동물보호론자가 아니다. 돼지를 키워 먹고산다. 그에게 연락을 한 건 봉준호 감독의 화제작 ‘옥자’를 보고 나서다. 대기업의 탐욕,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수퍼 돼지’ 옥자와 산골 소녀 미자의 교감이 스크린을 채웠다. 영화는 다소 위악적이다. 옥자와 미자, 두 무구한 캐릭터를 내세워 인간을 위해 희생되는 돼지들, 나아가 가축들의 열악한 사육환경을 고발한다. 웃음과 액션을 곁들이며 이 시대의 비인간성, 아니 비동물성을 한바탕 조롱한다.

돼지는 한국인의 으뜸가는 육류다. 지난해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2014년 기준 한국인 1인당 돼지 소비량은 24.3㎏. 전체 육류 소비량 51.3㎏의 절반 가까이 된다. 또 돼지는 예로부터 최고의 제수(祭需)였다. 마을 사람들은 정성을 다해 신령께 돼지를 바쳤다. 부정을 타지 않기 위해 제관들은 목욕재계를 잊지 않았다. 신라 토우(土偶) 중에서도 돼지는 여느 동물 인형보다 가장 많이 출토될 만큼 한국인과 친숙하다. ‘꽃돼지’ ‘복돼지’ 등 재물·행운을 상징했다. ‘더럽다’는 편견과 달리 잠자리·똥자리도 가린다.

그런 돼지가 요즘 수난이다. 비좁은 축사에서 오직 고기만을 생산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옥자’ 마지막 대목, 초대형 도살장에 끌려가는 수퍼 돼지들의 비명이 들릴 듯하다. 하지만 어쩌랴. “돼지를 여유롭게 키우려면 고깃값을 2~3배 올려야”(장성훈 대표) 하는 게 현실이다. 갈수록 늘어나는 우리들의 육류 소비를 거꾸로 돌리기는 어려운 일. 모두가 채식주의자가 될 수도 없다. 생명과학 발달로 인간이 ‘불멸의 신’이 되고자 하는 세상(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에서 쓸데없는 걱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옥자’를 찾는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 이 충돌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