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가로막은 아프가니스탄 소녀들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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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에서 로봇 만들기에 도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관련 산업이 크게 발달하지 않아서다. 도전하는 이가 여성이라면? 여성의 지위가 낮은 이곳에선,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이슬람 6개국 국민 입국 막는 트럼프 '반이민 행정명령' 여파로 #국제 로봇 대회 출전하려던 아프간 소녀들 비자 발급 거부당해

그럼에도 로봇 공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이곳 10대 소녀들이, 그 첫 관문을 통과하기도 전에 장애물을 만났다. 워싱턴포스트(WP) 등 미국 언론은 최근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에 입국하려던 이들이 비자 발급을 거부당했다”며 이 여학생들의 사연을 보도했다.

로봇 공학자의 꿈을 품고 국제 대회에 도전하려다 미국 입국을 거부당한 아프가니스탄 소녀들. [사진 퍼스트 글로벌 홈페이지 캡처]

로봇 공학자의 꿈을 품고 국제 대회에 도전하려다 미국 입국을 거부당한 아프가니스탄 소녀들. [사진 퍼스트 글로벌 홈페이지 캡처]

여섯 명의 10대 소녀가 미국으로 가겠다는 꿈에 부푼 건, 이번 달 워싱턴 DC에서 열릴 국제 로봇 대회 ‘퍼스트 글로벌’ 출전 때문이었다. 과학ㆍ기술ㆍ공학ㆍ수학 분야에서 젊은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열리는 대회로, 전 세계의 야망 있는 젊은이들이 몰린다.

아프가니스탄 헤라트 출신 이들 여학생 6명도 팀을 꾸려 도전에 나섰다. 그러나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지난 3월, 주최 측이 각국 참가팀에 로봇을 만들기 위한 재료를 보내줬지만 이들은 받을 수 없었다. 테러와 관련된 물품일 수 있다는 이유로 세관에 억류됐기 때문이었다.

소녀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발품 팔아 주변에서 재료를 구했다. 그렇게 몇 달 동안 로봇 만들기에 매달린 끝에, 드디어 ‘공 분류 로봇(ball-sorting robot)’을 만들었다. 로봇을 품에 쥐었지만 이번엔 부모님이 문제였다. 여성의 지위가 낮고 사회 분위기가 보수적인 이곳에서 어린 여학생들이 ‘미국에 가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렵게 허락을 받아낸 이들은 미국 입국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헤라트에서 수도 카불까지 가야했다. 그즈음 카불에서 트럭 테러가 일어났지만 소녀들의 열정을 막을 순 없었다. 이들은 800㎞가 넘는 먼 길을 두 번이나 오갔다.

그러나 이들의 꿈을 꺾은 건, 엄격하고 보수적인 아프가니스탄 사회도, 테러도 아니었다. 바로 미국 대사관이었다. 두 번이나 신청했음에도 단 1주일짜리 상용 비자 발급을 거부한 것이다. 구체적인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묵묵부답. 소녀들은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여성 IT회사 최고경영자(CEO)이자, 현재 이 팀을 후원하고 있는 로바 마흐붑 대표는 “남성이 지배하고 있는 로봇 산업에 여자 아이들이 뛰어들었단 사실만으로도 다른 이들에게 큰 자극이 될 것”이라면서도 “아이들이 이 소식을 듣고 무척 화가 났으며 하루종일 울었다”고 말했다.

올해 14살인 파테마흐는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걸 이 세상에 보여주고 싶고, 오직 한 번의 기회가 필요할 뿐”이라고 호소했다. 조 세스택 퍼스트 글로벌 대표도 “이렇게 용감한 소녀들이 미국에 올 수 없단 소식을 듣고 대단히 실망했다”는 의견을 밝혔지만, 이 팀이 미국에 오긴 쉽지 않아 보인다.

지난 5월 미국 시애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 이민 행정 명령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는 시민들[AP=연합뉴스]

지난 5월 미국 시애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 이민 행정 명령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는 시민들[AP=연합뉴스]

미 언론들은 소녀들의 꿈이 가로막힌 것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反) 이민 행정명령’의 여파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 법적 분쟁 중이지만 얼마 전 대법원에 의해 효력이 일부 인정된 것으로, 이란ㆍ시리아ㆍ리비아ㆍ예멘ㆍ소말리아ㆍ수단 출신 외국인의 입국을 90일간 제한하는 내용이다. 해당 조치에 포함된 국가뿐 아니라 중동과 아프리카의 다른 국가 출신 국민에게도 그 파문이 미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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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P는 “최근 국무부 기록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 비자를 받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며 “아프가니스탄 팀뿐 아니라, 대부분 국민이 이슬람교를 믿는 서부 아프리카 국가 감비아의 팀도 비자 발급을 거부당했다”고 보도했다.
현재 이 아이들이 퍼스트 글로벌 대회를 관람할 수 있는 방법은 온라인 영상 통화 ‘스카이프’를 통해 보는 것뿐이다.

소녀들은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아이들은 퍼스트 글로벌에 도전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고 싶습니다. 과학, 기술 그리고 다른 산업 분야에서도 많은 돌파구가 아이들의 꿈에서 시작됐습니다. 우리는 그런 아이가 되고 싶고,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주겠다는 꿈을 이룰 수 있기를 원합니다.”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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