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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사람 풍경] 잘난 맥주 못난 맥주 없다, 국산은 맛없다는 건 취향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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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하우스 맥주 시대 연 ‘옥토버훼스트’ 방호권 대표 

방호권 대표에게 맥주는 까다로운 친구다. 늘 청결에 신경 써야 한다. “후배 양조사들의 실수로 빚던 맥주를 버린 적도 5~6번 있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방호권 대표에게 맥주는 까다로운 친구다. 늘 청결에 신경 써야 한다. “후배 양조사들의 실수로 빚던 맥주를 버린 적도 5~6번 있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장독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독은 하나지만 배추김치가 있고 무김치가 있듯 용기는 하나지만 그 안에 무엇을 담그느냐에 따라 백맥주가 되고 흑맥주도 되죠.”

1세대 브루마스터 #국내 첫 독일서 양조공학 석사 학위 #맥주는 거짓말 안 해, 실수 하면 티 나 #맥주 춘추전국시대 #수제 맥주도 외부 업소 판매 가능해 #식약처에 등록 중소업체 70곳 #맥주 맛있게 마시려면 #호프 잔 얼려서 먹으면 향 만끽 못해 #섭씨 4~5도, 2~3㎝ 거품 나야 청량

방호권(44) 대표가 1000L짜리 대형 저장용기를 가리켰다. 그를 따라 지하 숙성실로 내려가니 모두 9개의 맥주탱크가 눈에 들어왔다. 콧구멍이 다소 시큼해졌다. “술 익는 냄새인가요?” “아니요. 소독 기운이 남아 있을 겁니다. 공기 중에 수많은 미생물이 있는데 그것들이 혹시라도 저장통에 들어가면 큰일나거든요. 술이 오염될 수, 즉 맛이 변질될 수 있어요. 매일매일 청결하게 관리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국내 하우스 맥주 시대를 연 옥토버훼스트 종로점 풍경이다. 옥토버훼스트는 2002년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국내에도 소규모 맥주 제조가 허용되면서 처음 생긴 수제 맥주 전문점이다. 방 대표는 국내 1세대 브루마스터(Brewmaster)다. 브루마스터는 맥아 선택부터 발효까지 맥주 생산 전 공정을 책임져 ‘맥주의 종합예술인’으로 불린다. 국내 첫 독일 양조공학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지난 15년간 묵묵히 맥주를 빚어왔다. 양조 장인으로 출발해 지난봄 전국 80여 호프집에 맥주를 대는 경영인 자리까지 올랐다. 달큼하면서도 쌉싸래한 그의 맥주 얘기에 한여름 더위를 식혀 보았다.

옥토버훼스트 경기도 용인공장 지하 저장실. 맥주에 따라 다르지만 숙성 기간은 보통 한 달 안팎이다.

옥토버훼스트 경기도 용인공장 지하 저장실. 맥주에 따라 다르지만 숙성 기간은 보통 한 달 안팎이다.

맥주의 계절이 돌아온 것인가.
“1년 중 가장 바쁜 시기다. 요즘 하루 평균 20L들이 생맥주통 200개 정도를 납품한다. 우리보다 크게 하는 업체도 제법 있다. 맥주의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제2의 전성기라고 할까, 소비자가 더욱 즐겁게 됐다.”
경쟁이 치열하다는 뜻인가.
“그렇다. 말 그대로 무한경쟁시대다. 2014년 주세법이 개정되면서 하우스 맥주도 외부 판매가 가능해졌다. 그 전에는 오직 만든 곳에서만 팔아야 했다. 덕분에 신규 업체 진입이 활발해졌다. 대기업도 크래프트(수제) 맥주시장에 하나둘씩 뛰어들고 있다.”
한때 수제 맥주 붐이 크게 일었다.
“2002년 처음 허용되면서 우후죽순으로 생겼다. 2005년까지 대략 140개에 이르렀다. 그때가 피크(peak)였다. 하지만 시장은 냉정하다. 거품은 쉽게 꺼졌다. 2010년께 30여 곳으로 쪼그라들었다. 돈만 보고 달려들었다가 낭패한 경우가 많다. 품질 관리에 소홀했던 거다. 높은 임대료도 큰 부담이 됐다.”
왜 다시 인기가 높아졌나.
“제도·환경 변화가 가장 큰 요인이다. 전문기술과 열정을 지닌 젊은이도 크게 늘었다. 각자 실험정신으로 새로운 맥주를 빚고 있다. 강원도 쌀이나 제주도 귤 등도 쓰고 있다. 현재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등록된 중소업체가 70여 곳에 이른다. 우리도 2년 전 부천에, 올해 용인에 양조장을 따로 차렸다.”
문제는 값이다. 일반 맥주의 두 배 정도다.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춘 공장 맥주와 단순 비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살펴볼 점이 있다. 수제 맥주가 국내에 처음 소개될 때 고급스럽게 포장된 측면이 있다. 매장·안주 구성도 부담스러웠다. 가격 문제는 경쟁을 통해 해결될 것이다. 수제 맥주도 문턱을 낮춰야 한다. 우리의 경우 500㏄ 기준으로 가맹 호프집에서 4000원대에 팔고 있다.”
수제 맥주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 맥주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전문가 뺨치는 애호가들이 최근 늘고 있다.

수제 맥주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 맥주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전문가 뺨치는 애호가들이 최근 늘고 있다.

대학을 마치고 바로 유학을 갔는데.
“연세대 식물생물공학과 93학번이다. 대학 3학년 때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에서 ‘마이크로 브루어리’(소규모 맥주제조)가 뜬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거다 싶었다. ‘한국에도 비슷한 시장이 열리겠구나’ 생각했다. 독일 뮌헨공대 맥주양조학 9학기 석사 과정을 마쳤다. 나만의 맥주를 만들고 싶었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진로를 정했다.
“대학생 때 맥주를 좋아했다. 유학 시절 미생물학·생화학·열역학 등을 공부하고, 맥주공장에서 실습을 했다. ‘동양인이 웬 맥주 공부?’라는 눈총을 받기도 했다. 지금 돌아보면 맥주 하나 보고 왜 그 어려운 분야를 공부해야 했는지 모르겠다. 요즘에는 굳이 유학 갈 필요가 없다고 권한다. 국내에서 도제 훈련을 받고 적성에 맞는지 먼저 따져봐야 한다.”
박사 과정은 왜 다니지 않았나.
“학위가 목표가 아니었다. 한국에 돌아와 맛있는 맥주를 만들고 싶었다. 선택에 후회는 없다. 제가 빚은 맥주를 손님들이 즐겁게 마시는 걸 보면 희열을 느낀다. 행복하다. 요리사들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 한다.”
키가 189㎝로 체구가 건장하다.
“몸을 많이 움직이는 일이다. 예컨대 50㎏짜리 맥아 부대를 메고 다녀야 한다. 중노동이다. 특히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맥주 맛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초창기에는 맛을 테스트하느라 하루 7000㏄까지 마시기도 했다. 맥주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바로 티가 난다.”
수입 맥주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1만원에 4개, 여느 편의점에나 붙어 있는 문구다. 국산 맥주가 자극받을 것이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소비자 취향이 반영된 결과다. 수제 맥주도 그런 트렌드에 올라탄 셈이다. 2015년 기준 전체 맥주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0.5%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계속 커 갈 것으로 본다. 술이나 문화나 요즘은 다양성이 키워드다.”
국산 공장 맥주에 대한 불만이 큰데.
“북한 맥주보다 맛이 없다는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취향의 문제다. 요즘 국산 맥주 기술 수준은 다른 나라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청량감을 중시하는 한국인 기호에 맞춰 다소 싱거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없듯 맥주에도 잘난 맥주, 못난 맥주 없다.”
한국 맥주를 편드는 건 아닌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독일 생맥주(라거)를 좋아한다. 재료와 맛의 균형감이 있다. 참기름을 듬뿍 친다고 비빔밥이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스펙트럼 측면에선 벨기에 맥주가 낫다. 독일 맥주가 엄격한 공정을 따르는 공장식 김치라면 벨기에 맥주는 집마다 다른 재래식 김치를 닮았다. 각자의 입맛을 존중할 뿐이다. ”
한국인은 시원한 맥주를 즐겨 찾는다.
“호프 잔을 얼려서 먹는 경우도 있다. 그래선 맥주의 향을 만끽할 수 없다. 미각이 죽는다. 외국에선 섭씨 7~9도를 가장 맛있는 온도로 친다. 우리의 경우 4~5도가 적당한 것 같다. 또 2~3㎝ 남짓 거품이 나게 따라야 탄산가스의 청량함을 즐길 수 있다.”
술맛은 보통 물이 좌우한다고 하는데.
“잘못된 상식 중 하나다. 맥주를 빚으려면 처음에 맥아 가루 넣은 물을 100도로 끓이는 과정이 있다. 수돗물이든, 암반수든 관계가 없다. 수돗물을 쓰는 독일 맥주도 많다. 지하수를 쓰는 건 값이 싸기 때문이다. 맥주의 향미는 맥아와 홉, 효모의 비율에 따라 결정된다.”
마지막으로 왜 맥주인가.
“소주·막걸리 등 주종을 가리지 않는다. 어떻게 한 가지만 좋아할 수 있겠나. 술보다 친구다. 분위기다. 저도 제 맥주에 물릴 때가 있다. 다른 사람이 만든 게 더 맛있을 수 있다. 독일에는 당뇨병 환자용 맥주도 있다. 당분을 최소화했다. 그렇게 보다 많은 이가 행복했으면 한다.”

[S BOX] 맥주 애호가 루터, 매일 2L 마셔 … 종교개혁의 촉매 주장도

‘맥주는 누구나 즐겨야 한다’.

방호권 대표의 ‘맥주철학’이다. 사람에 따라 돈지갑이 두껍거나 얇을 수는 있지만 맥주 앞에선 차별이 없기를 바란다. 맥주는 태생이 서민용이었다. 유럽의 옛 귀족들이 와인을 즐겼다면 서민들은 맥주 한 잔에 하루의 피로를 달래곤 했다.

올해는 마르틴 루터(사진)의 종교개혁이 500년을 맞는 해. 루터는 부패한 로마 가톨릭에 반발해 ‘오직 신앙으로 돌아가자’고 부르짖었다. 그보다 1년 전인 1516년 독일에선 ‘맥주 순수령’이 반포됐다. 바이에른 공국 빌헬름 4세가 물과 홉, 맥아 세 가지 원료로만 맥주를 빚어야 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서민의 건강을 위협했던 질 낮은 맥주, 물 탄 맥주를 금지하는 법령이었다. 독일 맥주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분수령이 됐다.

‘청빈과 절제’를 내세웠던 루터는 맥주 애호가였다. 맥주가 종교개혁의 촉매가 됐다는 주장도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지난해 ‘맥주 순수령’ 500주년 기념식에서 ‘맥주 없는 사람에겐 마실 게 없다’는 루터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실제로 루터는 매일 맥주 2L를 마셨다고 한다. 다만 과음을 경계했다. 한 잔 정도, 유쾌해질 만큼 마시라고 권했다.

방 대표가 맞장구를 쳤다. “제가 루터는 잘 모르지만 맥주가 보통사람들의 음료인 건 분명해요. 당연히 유쾌하게 즐겨야죠. 얼굴을 찌푸리고 심각하게 고민하며 마시는 것과 거리가 멀죠. 그런 건 소주에 어울리지 않을까요.”(웃음)

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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