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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_this week] 유모차 끄는 미남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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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2018 S/S 발렌시아가 맨즈 컬렉션에 등장한 패밀리 룩. [사진 발렌시아가 공식 인스타그램]

2018 S/S 발렌시아가 맨즈 컬렉션에 등장한 패밀리 룩. [사진 발렌시아가 공식 인스타그램]

요즘 힙한 남자들은 유모차를 끈다. 정말이다. 지난 6월 21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불로뉴의 숲(Bois de Boulogne)에서 열린 발렌시아가 2018 S/S 맨즈웨어 컬렉션에 등장한 남자들이 그랬다. 유모차 대신 한쪽 팔에 아이를 든 모델들이 공원 숲길을 따라 마련된 런웨이를 터벅터벅 걸었다. 한 손으로 아이를 들고 또 다른 한 손으로 아이 손을 잡고 등장한 것. 무려 아이 셋과 함께 등장한 모델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모델들의 실제 아이였으며 이날 총 일곱 가족이 런웨이를 걸었다.

아빠와 아이 주제로 선보인 발렌시아가 2018 S/S 맨즈웨어 컬렉션 #한 손엔 유모차, 한 손엔 라떼, 라떼파파가 온다

2018 S/S 발렌시아가 맨즈 컬렉션. [사진 발렌시아가 공식 인스타그램]

2018 S/S 발렌시아가 맨즈 컬렉션. [사진 발렌시아가 공식 인스타그램]

놈코어 대신 대디코어

남자들을 위한 최신 패션을 선보이는 자리에 아이라니? 무릇 패션쇼란 시크한 포스의 모델과 날 선 감각으로 벼려진 최신의 패션 이상향을 선보이는 자리 아니던가. 육아의 세계와는 극과극 정도로 동떨어진 세계 말이다. 그러니 난데없이 아이와 남자, 그리고 패션이라는 조합은 ‘역시 뎀나 바잘리아!’라는 감탄사를 불러일으킬 만큼 신선했다. 뎀나 바잘리아는 발렌시아가의 아티스틱 디렉터다.

뎀나 바잘리아. 현재 프랑스 디자이너 브랜드 '베트멍'의 대표 디자이너이자 발렌시아가의 아티스틱 디렉터다. 

뎀나 바잘리아. 현재 프랑스 디자이너 브랜드 '베트멍'의 대표 디자이너이자 발렌시아가의 아티스틱 디렉터다.

뎀나 바잘리아는 발렌시아가 쇼 노트에서 “자연 속에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젊은 아빠들을 보며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쇼는 ‘아빠에 대한 모든 것’이었다. 큰 폴로 셔츠와 하와이안 풍의 화려한 셔츠, 9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강렬한 색의 팬츠에 헐렁한 아빠 재킷, 허리춤까지 끌어올린 ‘배바지’ 패션까지. 전형적인 90년대의 아빠의 모습을 한 무표정한 모델들 옆으로 아이들이 웃으며 등장했다. 품에 폭 안기는 영유아부터, 키가 훌쩍 큰 십대 소녀까지, 뎀나의 전매특허인 후드티와 스웨트 팬츠, 운동화를 신은 아이들의 모습은 기존 남성 패션쇼에서는 볼 수 없었던 따뜻하면서도 근사한 풍경이었다.
‘대디코어(daddycore)’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발렌시아가가 이번 쇼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단어로 노말과 하드코어의 합성어인 패션 용어 ‘놈코어(normcore ·평범함을 추구하는 패션)’에서 따온 말이다. 직역하면 아빠를 추구하는 패션, 즉 아빠 패션인 셈이다.

아이, 가족 배제해왔던 남성 패션 세계

2018 S/S 발렌시아가 맨즈 컬렉션. 무표정한 모델과 웃는 아이들의 표정이 대조를 이룬다. [사진 발렌시아가 공식 인스타그램]

2018 S/S 발렌시아가 맨즈 컬렉션. 무표정한 모델과 웃는 아이들의 표정이 대조를 이룬다. [사진 발렌시아가 공식 인스타그램]

사실 전통적으로 남성 패션의 세계에는 가족이 없었다. 기존의 남성 패션 매거진만 봐도 그렇다. 매달 쏟아져 나오는 화려한 신제품들로 부유한 4050의 남성들을 겨냥한다. 외제차를 몰고 근사한 시계를 하나쯤 구입할 수 있으며 감각적인 셔츠를 알아볼 수 있는 취향을 가진 남자들이 주로 등장한다. 자신의 삶과 스타일을 가꾸는데 열정적인 이들에게 당연히 가족은 지워져있었다.
3040 ‘모던파더’를 조명하는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볼드저널’의 최혜진 편집장은 “사실 패션 계는 철저히 싱글 남자의 세계로, 기존 남성 패션 시장에서 가족 관련된 스토리는 아주 드물게 소비되어왔다”며 “현실과 동떨어진 남자들의 이상향으로서의 환상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패션계의 최대 목표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남성 패션 시장에 아이를 안은 아빠가 등장한 발렌시아가의 패션쇼는 그 자체로 이례적이라는 평이다.

2018 S/S 발렌시아가 맨즈 컬렉션. 아이와 함께 등장한 아빠 패션을 선보였다. [사진 발렌시아가 공식 인스타그램]

2018 S/S 발렌시아가 맨즈 컬렉션. 아이와 함께 등장한 아빠 패션을 선보였다. [사진 발렌시아가 공식 인스타그램]

라떼파파가 온다

스웨덴 등 복지 국가에서는 유모차를 미는 아빠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사진 SBS 스페셜-아빠의 전쟁 화면 캡쳐]

스웨덴 등 복지 국가에서는 유모차를 미는 아빠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사진 SBS 스페셜-아빠의 전쟁 화면 캡쳐]

지난 1월 1일 방영된 ‘SBS 스페셜-아빠의 전쟁’에서는 생소한 단어 하나가 등장한다. 바로 ‘라떼파파’다. 주로 아빠의 육아휴직이 자유로운 북유럽 등지에서 목격할 수 있는 한 손에는 유모차, 한 손에는 라떼를 든 아빠들을 일컫는 신조어다. 한쪽에는 이어폰을 끼고 다른 한 손으로 유모차를 미는 여유로운데다 심지어 패셔너블한 아빠들. 남성은 물론 심지어 여성도 육아 휴직이 자유롭지 않고, 아직까지 남성을 주 양육자로 여기지 않은 사회적 분위기가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확실히 생경한 풍경이긴하다. 그런데 낯설지만 이 '라테파파' 참 달콤하긴 하다.
아이 양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자신이 주 양육자임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이 새로운 개념의 아빠상에 호감을 갖는 것은 양육하는 아빠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셔터맨' 등 살림하는 남자를 비하하는 표현이 만연했던 과거와는 확실히 다르다. 가족과의 관계를 잘 맺고 가정을 돌볼 줄 아는 좋은 남자로 이들을 대한다. ‘볼드저널’의 최 편집장은 “남성이 주 양육자로 보이는 것이 오히려 쿨하고 멋져보이는 시대”라며 “가족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삶의 스타일을 가진 남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쪽 귀에 이어폰을 낀 시크한 남자가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를 안고 걷는 모습. [사진 SBS 스페셜-아빠의 전쟁 화면 캡쳐]

한쪽 귀에 이어폰을 낀 시크한 남자가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를 안고 걷는 모습. [사진 SBS 스페셜-아빠의 전쟁 화면 캡쳐]

패션은 시대를 반영한다. 발렌시아가의 수장 뎀나 바잘리아는 동시대의 패션을 살짝 비틀어 새롭게 제안하는 데 능숙한 디자이너다. 그가 남성의 패션을 이야기하는데 아이를 끌어온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모성이 아닌 부성을 기반으로 한 패밀리룩을 제안하는 것, 지금 가장 '패셔너블'한 시도다.
흔히 남자를 위한 최고의 패션 액세서리로 반짝이는 구두, 잘 재단된 코트, 묵직한 시계 등을 떠올린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아이를 적극적으로 양육하는 아빠가 멋지고 ‘쿨’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 아마도 이제 남자들을 위한 최고의 액세서리는 아이다.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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