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졸리앙의 서울이야기

(31) 사막의 순례자처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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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인생의 오아시스 찾아가는 길, 두려움과 탐욕을 버리자

쓰라린 고통이 도사린 곳은 어디인가? 뜨거운 욕망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은 어느 샘에서 목을 축이나? 우리가 무엇을 하든 가슴속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수피 신비주의자인 잘랄 앗딘 루미는 단번에 우리를 해방시켜 줄 처방을 제시한다. “인간 안에 똬리 튼 사랑, 고통, 불안, 충동. 그렇게 잡다한 세계를 자기 것이라며 챙기고 있으니 휴식과 안정을 누릴 턱이 있는가. 사람들은 저마다 온갖 직업에 종사하고 숱한 배움에 매진하지만 욕심이 채워지지 않는 한 쉴 수 없나니. 영혼이 쉬는 상태야말로 지복의 경지. 자기 내면에서 쉬지 못하는데 어디서 쉴 수 있단 말인가?”

하루의 번잡한 일상으로 뛰어들기에 앞서 나는 마음 한구석에 처박혀 투덜대는 결핍을 돌아보고, 더 나은 삶으로 끊임없이 나를 부추기는 충동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아무리 못 본 척 외면하고, 술기운이나 유흥에 기대어 모른 척하려고 해도 소용없다. 결코 저절로 닥치고 있을 녀석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현인들은 삶이란 사막을 가로지르는 순례자의 행렬과 같다고 했다. 오아시스에서 오아시스로 옮겨 다니는 우리의 처지가 그렇다는 얘기다. 물론 충분한 휴식과 기력을 제공해줄 오아시스를 찾는 건 각자의 몫이다. 그렇기에 삶에서 부닥치는 모든 사건과 시련은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진 단계들일 수 있다. 오늘은 어떤 단계가 내 앞에 준비돼 있을까. 오늘 이 날을 통해 나는 무엇을 배우고 얻어 가야 하는가. 지금 내가 부닥친 이 난관은 내게 무엇을 가르쳐주는가? 영혼의 교사들은 인생의 의미 있는 단계들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라고 우리를 독려한다. 눈앞의 삶이 엉망일지라도 마음먹기에 따라 큰 폭의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중요한 건 영혼의 내밀한 소리에 귀 기울이는 담력이다. 너무 좁은 시야로 길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조급한 전망으로 삶을 내다보아서는 결코 발전할 수 없다. 결실이 당장 눈에 들어오지 않아도 삶은 항상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메마른 황무지를 횡단하는 순례자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보다 어느 한 곳에 묶여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모든 만남과 우연, 선물과 베풂을 피하지 않으면서 틈틈이 하늘에 감사하고, 잠시 정지하는 것 또한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다. 순례자의 지팡이란 길을 몰라도 꿋꿋이 걸어가는 힘의 상징이다. 매일 한 걸음 한 걸음, 1mm씩 전진해 가며 새로운 목적지를 발견하는 능력이다.

이런 유랑의 지혜는 아집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중구난방 나를 잡아당기는 찰나의 갈증들을 넘어 가장 깊은 내면의 부름에 응하는 법을 알려준다. 고난에 부닥칠수록 어디선가 나를 기다릴 샘이 있음을 귀띔해주고, 위험에 처하면 새로운 행로를 열어줄 나침반을 쥐어준다. 오늘은 그 유랑의 지혜가 어느 방향으로 나를 이끌까. 지금 여기, 나는 삶의 어떤 단계를 거치며 걸어가고 있는 중일까.

어차피 까마득한 사막을 횡단 중이라면 짐이라도 가벼운 게 좋을 터. 조잡한 망상들, 인생을 좀먹는 두려움과 탐욕, 결핍을 손쉽게 채우려는 얄팍한 의도, 기만적인 역할과 거짓 행복일랑 미련 없이 버리자. 그 모두가 진정한 오아시스로 가는 길의 장애물일 뿐이다.

스위스 철학자/번역 성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