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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암초 부딪힌 문 대통령의 6.15 제안, 한미간 엇박자 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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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오는 28~29일 첫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의욕적으로 던진 '6·15 제안'이 출발부터 암초를 만났다.
 한미간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논란에 이어 북한이 혼수상태에 빠진 미국인 오토 웜비어를 방치하다 석방한 사건때문에 미국내 대북 여론이 급격히 악화됐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감정은 최악인데, 문 대통령은 "핵과 미사일 도발 중단 땐 조건없이 대화하겠다"고 대화를 제의하면서 첫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서울 따로 워싱턴 따로'의 엇박자도 연출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북한 관련 언급은 16일에도 이어졌다. 제주에서 열린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2차 연차총회 개막식 축사에서 “남과 북이 철도로 연결될 때 새로운 육상ㆍ해상 실크로드의 완전한 완성이 이뤄진다”고 강조했다.
핵과 미사일 도발을 중지할 경우 북한이 기대할 수 있는 청사진을 제시한 모양새다. 이날 조명균 통일부 장관 후보자도 기자들과 만나 “북한이 (자신들이 강조해온) 6.15 및 10.4 공동선언의 정신으로 돌아와 대화에 나와야 한다는 게 문 대통령의 생각"이라고 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제안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미 국무부 헤더 노어트 대변인은 15일(현지시간) “문 대통령의 발언을 지지하느냐”라는 중앙일보의 질문에 “우리의 입장은 바뀐 게 없다"며 "대화를 하기 위해서 북한은 비핵화를 해야 한다. 북한이 이런 단계를 밟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답을 보내왔다. 답변서엔 “우리는 북한에게 도발을 줄이도록 요구해왔지만 북한은 이런 요구에 전혀 근접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적인 내용도 함께 담겼다.

미국의 태도는 지난 5월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이 문 대통령의 대미 특사단을 만나 “(대화 재개를 위해) 미국을 믿고 일정 기간 핵ㆍ미사일 실험 중지를 행동으로 보여라”고 촉구했던 것에 비해 오히려 강경해 졌다.
당시엔 미국은 문 대통령과 비슷한 '핵과 미사일 실험 중지'를 북한에 요구했지만, 문 대통령의 대북 제안 이후엔 그 조건이 '북한의 비핵화'로 오히려 빡빡해졌다. 그래서 "6월말로 예정된 양국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사이에 이견이 불거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입장이 강경해진 걸 두고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불거진 사드 체계 배치 논란의 여파와, 오토 웜비어 사건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한 외교 소식통은 "사드 배치 논란이 미 행정부와 의회 등 공적 부문의 대 한국 여론을 악화시켰다면, 웜비어 사건은 일반 미국민의 대북 여론을 분노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실제 최근 미국내 분위기는 심상찮다. 웜비어가 입원한 미 신시내티대 병원 의료진은 15일(현지시간) 기자회견을 열어 “웜비어는 광범위한 뇌조직 손상에서 비롯된 의식불명 상태로,(북한이 주장했던)식중독에 걸렸다는 증거는 찾기 못했다”고 설명했다. 오토의 아버지인 프레드 웜비어는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우리 아들을 대한 방식에 대해선 용서하지 않겠다”며 “(김정은 정권에 의해) 아들은 테러를 당하고 잔인한 일을 겪었다”며 규탄했다.
 국무부 헤더 노어트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이번 송환은 ‘협상’이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 사람을 데려오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번 송환을 계기로 북미간 협상이 재개될 가능성을 한마디로 일축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웜비어가 지난 14일 미국에 도착한 후 아버지 프레드 웜비어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슬픔(sorrow)’을 표시했다고 한다.
미국 정부가 북한과의 대화를 전향적으로 검토할 여지가 점점 줄어드는 셈이다.

이날 중국 외교부는 "북한과 한국 양측이 적극적인 신호를 보내는 것을 환영한다"며 문 대통령의 제안을 평가했다. 하지만 정작 북한은 아직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북한의 대남기구인 대남기구인 민족화해협의회가 15일 밤 대변인 담화에서 “남조선 당국의 우유부단하고 모호한 태도로 (6ㆍ15 남북공동행사가) 끝내 성사되지 못 했다. 지금처럼 나가다간 관계 개선은 고사하고 변변한 대화 한 번 못해본 보수정권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고 했지만 문 대통령 제안에 대한 반응으로 보기는 어렵다.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한미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이 '6.15 제안'을 무리하게 추진하기 보다는 공감대 확보에 치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마디로 '배트를 짧게 잡으라'는 조언이다.
 남성욱 고려대 행정전문대학원 교수는 "웜비어씨 사건으로 미국내 대북 여론이 최악이기 때문에 문 대통령이 지나치게 대북 유화책으로 비쳐지는 제안을 앞세우면 2001년 3월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첫 회담때와 같은 일이 벌어질 우려가 있다"고 했다. 당시 DJ는 새로 취임한 부시 전 대통령에게 한국의 햇볕정책을 길게 설명했고, 부시 전 대통령은 기자회견장에서 김 전 대통령을 ‘이 양반(this man)’이라고 부르며 불편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전직 장관급 외교관은 “문 대통령의 대북 접근법은 언젠가는 한미간에 논의해야 할 구상 중 하나지만 이번엔 아니다"라며 "9년간의 남북관계 단절을 일거에 만회하려고 하기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워싱턴=채병건특파원 서울=차세현기자 cha.seh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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