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자 150명 설 런던테러.."꿈을 찾아 왔지만 영국은 지켜주지 못했다" 신원 확인된 첫 사망자는 시리아 난민 공학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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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이 나 한테까지 다가왔어.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전해줘.”

시리아 친구와 마지막 통화서 "불길이 다가온다. 가족에게 작별인사를.." #최초 공개된 내부 사진 처참, 현장에선 "아이들 위주로 150명 숨져" #1400억원 넘는 고급주택도 있는 부촌에 외딴 섬 같은 임대아파트 #"정부와 민주주의 작동했으면 막을 수 있었다" 영국 사회 양극화 민낯 드러나 #

런던 화재 참사가 일어난 지난 14일(현지시간) 새벽 24층 임대아파트인 그렌펠타워 14층에서 모하메드 알하잘리(23)가 시리아에 있는 친구와 2시간 동안 나눈 통화의 마지막 말이다. 조국 시리아의 참혹한 전쟁을 피해 형 오마르, 동생 하셈과 함께 영국에 온 그는 웨스트런던대에서 공공기술 공학을 전공하던 대학생이었다.
그는 화재를 피해 형ㆍ동생과 대피하다 자욱한 연기로 통로를 찾지 못해 아파트로 돌아갔다가 변을 당했다. 그의 형 오마르는 “화재를 피해 계단으로 내려왔는데 나중에 밖으로 나와보니 알하잘리가 보이지 않았다. 전화 통화를 해 ‘구조요원이 밖으로 안내했는데 왜 나오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왜 나를 놔두고 갔느냐'고 하더라"며 울먹였다.

알하잘리는 현재까지 확인된 화재 사망자 17명 중 가장 먼저 신원이 확인됐다. 런던에서 난민들을 지원해온 시리아연대캠페인측 관계자는 “안전과 꿈을 찾아 목숨을 걸고 고향을 떠나 왔지만 영국은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고 말했다.

임대아파트 20층에 살던 사진작가인 카디자 사예(20)도 숨진 채 발견됐다.

영국 24층 임대아프 화재로 숨진 시리아 난민 모하메드 알하자리(왼쪽)과 형 오마르.  [허핑턴포스트 캡처]

영국 24층 임대아프 화재로 숨진 시리아 난민 모하메드 알하자리(왼쪽)과 형 오마르. [허핑턴포스트 캡처]

이날 처음으로 공개된 아파트 내부 사진에 따르면 금속재질 가전제품 등을 제외하고는 벽명까지 모두 녹아내릴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생존자는 물론이고 사망자의 신원 파악조차 쉽지 않는 참사가 빚어진 것이다.

이번 화재를 보는 영국인들의 여론은 분노로 바뀌고 있다. 텔레그래프 등 영국 언론들은 일제히 “슬픔이 분노로 바뀌고 있다"고 보도했다.

테리사 메이 총리는 사건이 나고 10여 시간 후에야 내각 회의를 개최한데 이어 이튿날이 되서야 현장을 찾았으나 피해 주민들과 만나지도 않고 떠나 비판을 받고 있다.

총선 과반 실패보다도 이번 참사가 메이의 정치생명에 더 큰 위기라는 분석이 나고 있는 가운데 메이 총리는 '공개 조사(Public inquiry)’를 지시했다. 청문회도 개최키로 했다.

처음으로 공개된 화재 아파트 내부 모습. [BBC 페이스북]

처음으로 공개된 화재 아파트 내부 모습. [BBC 페이스북]

사디크 칸 런던시장은 현장을 찾았다가 7살 소년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어린이 친구들이 죽었나요. 당신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건가요"라는 불만에 찬 질문을 받기도 했다.

영국 당국은 현재까지 17명이 숨졌다고만 발표하고 있으나 현지 언론들은 피해자 수가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런던경찰 스튜어트 쿤디 국장은 “사망자 모두의 신원을 확인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며 ”세자릿수가 아니길 바란다"고 말했다.

화재 현장에서 피해자들을 돕고 있는 릴리 알렌은 언론 인터뷰에서 “경찰로부터 건물 안에 아이들 위주로 사망자가 150명에 달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주장했다.
 실종자 가족들은 전단지를 뿌리거나 직접 병원을 돌며 가족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각에선 정부가 일부러 피해자 규모를 발표하지 않고 있는 게 아니냐는 시선도 보내고 있다.

영국 경찰은 해당 아파트 리모델링 때 2012년부터 미국에서 사용이 금지된 외장재와 유사한 제품이 사용됐다고 보고 그 경위와 범죄 혐의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영국 언론들은 이번 화재가 영국 사회의 양극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지적한다.

 화재가 난 그렌펠 타워는 소말리아, 시리아 등 이민자들이 주로 거주하는 임대아파트인 반면 주변 지역은 영국에서 부촌으로 손꼽힌다. 켄싱턴첼시왕립자치구 중 참사 발생 지역은 외딴 섬 같은 곳이었다. 이 자치구에 있는 고급 주택의 경우 매매가가 한화로 1450억원이 넘을 정도다.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는 현장을 찾아 “이 구의 남부는 영국 내에서 가장 부유한 곳이지만 화재가 발생한 북부는 최빈 계층이 사는 곳"이라며 ”가난한 사람들이 살 곳을 찾아 해매는 동안 부유층은 고급 주택에 투자하고 있다"며 "화재 피해자를 위해 투자용으로 구입돼 비어있는 주택을 징발해 제공하자"고 주장했다.

아파트에 거주했던 주민들은 “우리는 가연성 싸구려 장식을 원했던 게 아니라 안전을 원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지역사회 운동가인 필그림 터커는 “자산이 사람보다 중요하고, 부동산이 생명보다 중요했다"며 “정부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이번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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