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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치로 막혀있는 R&D 모세혈관을 뚫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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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준호 기자 중앙일보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최준호산업부 차장

최준호산업부 차장

“민간자율로 하라고 말만 하면 뭐하나. 기관장은 물론 요직은 다 관료 출신이 낙하산 타고 내려와 지시하는데 무슨 자율이나 창의성이 나오겠어.”

대학 동기인 한 연구관리 전담기관 간부가 털어놓은 말이다. 업계에선 에이전시라고도 부르는 연구관리 전담기관은 정부 대신 국가 연구개발(R&D) 과제를 기획하고 관리·감독하는 기관이다. 그는 지난 20여 년간 연구관리 전담기관에서 R&D 과제 심사 등의 업무를 하면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그는 연간 20조원에 가까운 예산이 들어가는 국가 R&D 과제가 제대로 된 성과 없이 허투루 쓰이고 있는 가장 큰 이유를 ‘자기 밥그릇 챙기려는 관치(官治)’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과학기술계 연구자들이 “박사 위에 주사”라는 표현으로 관치의 고통을 호소하는 것과 같은 얘기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 들어 장관급 부처로 확대되는 중소기업청을 들여다보자. 중기청 산하 한 연구관리 전담기관은 기관장이 중기청 국장 출신이고, 기획조정본부 등 4명의 본부장 중 3명도 중기청 과장급 출신이다. 다른 곳도 상황은 비슷하다. 기관장은 소관 부처 차관이나 실·국장 출신, 주요 본부장은 과장 출신이 내려오는 게 당연한 ‘공식’처럼 돼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R&D 기획단계에서부터 관리·감독까지 관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 정부 관료는 “산하 기관이 매년 R&D 관련 예산을 따와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힘 있는) 부처 간부 출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R&D 예산 분배에 과제의 본질보다는 관치의 인연과 힘이 더 필요하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특정 국가 과제를 독립적으로 관리·감독한다는 책임자(PM)는 차관급 연봉을 받는 전문 계약직이지만, 부처 사무관에게도 쩔쩔매야 한다.

이런 연구관리 전담기관은 해가 갈수록 늘어나는 모양새다. 2009년 10개였던 전담기관은 지난해 22개로 배 이상 늘어났다. 같은 기간 예산도 1조1900억원에서 2조400억원으로 71.4%나 불어났다. 국가 R&D 예산의 10% 이상을 관리에 쏟아붓고 있는 셈이다. 연구자는 이런 구조 속에서 관행처럼 국가 R&D 과제를 따내고, 관의 눈치를 보며 연구를 수행해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그런 과제의 성공률은 언제나 95% 이상이다. 결과물이 실제 기업과 연계돼 성과를 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들 연구과제를 분배하고 따내고, 수행하는 데만 만족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과학기술정책의 혁신을 위해 미래창조과학부 내 실장급 조직이던 과학기술전략본부를 차관급인 국가과학기술혁신본부로 만들어 국가 R&D 예산심의 등을 맡긴다는 계획이다. 과학기술 컨트롤타워를 강화해 문제점을 해결하겠다는 전략이리라. 하지만 관치의 콜레스테롤이 심장부가 아니라 오장육부 사지로 뻗어 있는 모세혈관에 오래도록 쌓여 무성과라는 질병을 낳고 있는 현실을 통찰해야 한다.

최준호 산업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