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년 역사의 젓가락에 담긴 품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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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4호 32면

지난달 종영한 tvN의 예능프로그램 ‘윤식당’에서 한 프랑스인 가족의 식사장면을 흥미롭게 봤다. 방송을 위해 발리의 한 섬에 차려진 한식당에서 이들은 불고기 누들을 젓가락으로 맛있게 먹었다. 아들이 포크를 쓰자 부모는 마치 그것이 틀린 식사법인 양 말을 건넸다. “너도 젓가락을 써보렴.” 그들에게 젓가락은 동양의 낯선 도구가 아니었다. 젓가락질도 꽤 능숙하게 잘했다.

『젓가락』 #저자: 에드워드 왕 #옮긴이: 김병순 #출판사: 따비 #가격: 2만2000원

이 프랑스인 가족처럼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는 인구수가 15억 명이 넘는다고 한다. 책은 중국계 미국인 학자가 쓴 젓가락 역사문화서다. 미국 로완대 교수(역사학)인 저자는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젓가락의 역사를 살펴보는, 영어로 쓴 최초의 책”이라고 책 소개를 한다. 아시아 지역을 넘어 점점 확장되고 있는 젓가락문화권의 시발점과 파급력의 배경, 영향 등을 면밀히 추적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저자에 따르면 최초의 젓가락은 중국 장쑤 성의 신석기 유적지에서 발굴된, 가느다란 동물 뼈막대들이다. 기원전 6600년~기원전 550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식사 도구보다 조리 도구에 가까웠다고 한다. 춥고 건조한 날씨 때문에 뜨거운 음식을 즐겨 먹던 중국인의 음식 문화에서 영향을 받았다. 뜨거운 음식 재료를 집고 휘젓고, 불 속 땔감을 다루기 위해 젓가락을 처음 썼던 것으로 보인다.

젓가락이 주요 식사 도구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도 음식의 영향이 컸다. 마치 서양인이 구운 고깃덩어리를 식탁 위에서 잘라 먹기 위해 포크와 나이프를 쓰는 것처럼 말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원래 숟가락을 더 중요하게 썼다. 죽처럼 곡물로 만든 음식을 떠먹기 위해서다. 젓가락은 그 외의 음식을 집어 먹을 때 쓰는 부차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국수와 만두 같은 밀가루 음식에 대한 수요가 점점 늘어나면서 젓가락은 숟가락의 지위를 넘어서게 된다.

젓가락의 길이에도 나라별 차이가 있다. 한 상에 많은 음식을 차려놓고 여러 사람이 함께 먹는 중국의 경우 젓가락의 길이가 25㎝ 이상으로 길었다. 식탁 한가운데 놓인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기 쉽게 하기 위해서다. 반면 개인 접시와 그릇에 음식물을 담아 놓고 먹는 것을 좋아하는 일본의 경우 젓가락의 길이가 짧다. 저자는 “일본인이 개별적으로 밥상을 받아서 먹는 것은 다다미에 앉아 밥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쓰고 나서 버릴 수 있는 나무젓가락을 선호한다. 한 번 입에 들어갔다 나온 젓가락에는 사람의 영혼이 붙는다고 생각해서다.

한국에서는 쇠 젓가락을 주로 쓴다. 한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젓가락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청동제 젓가락이다. 저자는 한반도에 금ㆍ철ㆍ구리 등의 매장량이 풍부하고 금속공예 기술이 발달한 덕이라고 진단했다.

막대 두 개를 한 쌍으로 써야 하는 젓가락의 특성이 연인 사이를 상징하는 증표가 되기도 했다. 서로 뗄 수 없는 관계, 천생연분이라는 의미를 듬뿍 담아서다. 찍어누르고 썰어버리는 서양의 포크ㆍ나이프와 달리 우아하게 젓가락질을 하는 모습이도 문화적인 코드로 읽히기도 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1915~1980)는 이를 비폭력의 문화로 진단했다.

“젓가락은 음식을 베거나 찌르거나 난도질하거나 잘라내는 것을 거부하는 식사도구다. 젓가락으로 먹는 음식은 이제 더 이상 폭력을 가해서 얻은 먹이가 아니라, 조화롭게 이동된 물질이다. 젓가락은 지치지 않고 어머니가 밥을 한입 떠먹이는 것 같은 몸짓을 하는 반면, 창과 칼로 무장한 서양의 식사 방식에는 포식자의 몸짓이 여전히 남아 있다.”

글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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