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죽음의 문턱서 마오가 불러 목숨 건진 시중쉰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533호 28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31>

1 화가 위안펑페이(袁鵬飛)가 그린 산간(陝甘)변구 근거지 창건시절의 시중쉰과 류즈단. [사진 김명호 제공]

1 화가 위안펑페이(袁鵬飛)가 그린 산간(陝甘)변구 근거지 창건시절의 시중쉰과 류즈단.[사진 김명호 제공]

1928년 국·공합작이 깨졌다. 국민당의 공산당 소탕은 무시무시했다. 산시(陝西)성 북부, 산베이(陝北)지역의 사범학교 재학생 한 명이 체포됐다. 2개월 후 시안(西安)의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변구 소비에트’ 주석 된 시중쉰 #혁명근거지 21개 현으로 확대 #장정 종착점 변구에 도착한 마오 #시중쉰의 포고령 읽고 미소 #생매장 당할 위기의 순간 불러 #“이렇게 젊은 사람일 줄이야” 탄성

산시성 군정장관 쑹저위안(宋哲元·송철원)은 재판정을 자주 순시했다. 재판 기다리는 앳된 학생을 발견하자 수행원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잡혀 왔는지 알아 봐라.” 열다섯 살 먹은 사상범이라는 보고를 받자 그 자리에서 지시했다. “철없는 어린애다. 사상범은 무슨 놈의 사상범, 당장 풀어 줘라.” 쑹저위안이 석방시킨 학생은 감옥에서 공산당원이 된 시중쉰(習仲勛·습중훈)이었다.

쑹저위안은 5년 후 이 학생이 류즈단(柳志丹·유지단), 셰쯔장(謝子長·사자장)과 함께 산시성과 간쑤성(甘肅省·감숙성) 접경지역에 산간변구혁명근거지(陝甘邊區革命根據地)를 구축하고, 21살 때 ‘변구 소비에트’ 주석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중공은 감옥에서 풀려난 시중쉰을 군에 침투시켰다. “양후청(楊虎城·양호성)이 지휘하는 서북군에 잠복해서 공산당 조직을 발전시켜라.” 시중쉰은 수송 업무를 맡았다. 국민당 군 200여 명을 홍군으로 둔갑시켰다. 19살 나던 해 봄, 반란을 일으켰다.

국민당 군과 토비(土匪)가 반란군을 포위했다. 포위망은 겨우 뚫었지만 탄약과 식량이 거덜났다. 시중쉰은 류즈단의 근거지가 있는 자오진(照金)으로 피신했다. 초면의 류즈단에게 실패 원인을 설명했다. “덤벙대는 바람에 일을 그르쳤다.” 류즈단은 겨우 19살인 청소년 혁명가를 격려했다. “이번 실패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마라. 나는 너보다 더 많이 실패했다. 뜻대로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중공 산시성 위원회 지도부는 극좌(極左) 일색이었다. 융통성 많은 류즈단이 못마땅했다. 정치위원을 파견해 류즈단의 직무를 정지시키고, 셰쯔장은 부대에서 내쫓았다. 정치위원은 전투경험이 없었다. 맹목적인 군 출동이 빈번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변구는 류즈단의 추종자와 정치위원을 따르는 파로 갈라섰다. 시중쉰은 두 세력의 포섭대상이었다.

정치위원은 변구에 적응을 못했다. 국민당에 투항했다. 변구는 위기에 몰렸다. 행동 통일을 위해 투표로 주석을 선출하기로 합의했다. 시중쉰이 2표 차이로 당선됐다. 주민들은 어린 주석의 탄생을 의아해 했다. 그럴 만도 했다. 당시 시중쉰은 21살이었다.

어린 주석은 매서웠다. 류즈단·셰쯔장·가오강(高崗·고강)등과 합세해 근거지를 21개 현(縣)으로 확대시켰다. 국민당 군의 포위 공격에 몰린 남방의 중앙홍군이 장정(長征)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2 부총리 시절 부인 치신(齊心), 아들 시진핑과 함께 공원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시중쉰. 1959년 겨울, 베이징. [사진 김명호 제공]

2 부총리 시절 부인 치신(齊心), 아들 시진핑과 함께 공원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시중쉰. 1959년 겨울, 베이징. [사진 김명호 제공]

1935년 가을, 중공 중앙과 중앙홍군이 장정의 종착점 산베이에 발을 디뎠다. 변구에 도착한 마오쩌둥은 어느 마을이건 붙어 있는 ‘산간변구 소비에트 포고령’을 읽고 미소를 지었다. 홍군 지휘관들에게 변구 건설자들을 치하하며 포고령을 언급했다. “이 지역에 근거지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무슨 어려움을 겪었을지 모른다. 주민들에게 내린 포고령을 자세히 봐라. 우리 생각과 그게 그거다. 말미에 시중쉰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누군지 궁금하다.”

시중쉰은 마오쩌둥보다 먼저 도착한 좌경분자들에 의해 옥중에 있었다. 생매장하기 위해 구덩이까지 파 놓은 상태였다. 죽음의 문턱에서 마오가 부르는 바람에 목숨을 건졌다. 시중쉰을 만난 마오는 “이렇게 젊은 사람인줄 몰랐다”며 탄성부터 질렀다. 이 얘기 저 얘기 나눠 보니, 미운 구석이 한 군데도 없었다. 중용하기로 작정했다. 절차를 밟았다. 중앙 정치국 회의에 젊은 지방간부를 참석시키자며 시중쉰을 추천했다. 반대가 있을 리 없었다.

마오쩌둥은 시중쉰을 관중(關中)으로 파견했다. “관중지역은 변구를 지킬 남대문이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너는 그곳 사정에 밝다. 군중을 동원해서 정권을 세워라.” 관중은 진시황의 수도였던 고도(古都) 시안과 주변을 일컫는, 산시성 중부의 광활한 지역이었다. 동북에서 철수한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의 동북군과 양후청의 서북군, 국민당 중앙군이 변구의 중앙홍군을 섬멸하기 위해 시안에 주둔하고 있을 때였다.

시중쉰은 산간지역으로 파고들었다. 당시 측근의 회고를 소개한다. “시중쉰은 산베이의 최전선에 지휘부를 개설했다. 산간지역이다 보니 국민당 군의 왕래가 뜸했다. 군사적으로는 국민당이 우세했지만, 민심은 우리 편이었다. 시중쉰은 인간관계를 잘 처리했다. 군중이 우선이고, 간부는 그 다음이라는 말을 자주했다. 간부, 군중 할 것 없이 시중쉰을 비난하는 사람이 없었다. 군중영수(群衆領袖)로 손색이 없었다.”

일본과 전면전이 벌어지자 국·공 양당은 손을 잡았다. 산간 근거지는 중공의 항일전쟁 대본영으로 변신했다. 시중쉰이 건립한 관중근거지도 8년에 걸친 항일전쟁기간 산간 근거지의 전초기지 역할을 해냈다.

중일전쟁 승리 후, 마오쩌둥은 시중쉰을 ‘중공 중앙 서북국 서기’에 임명했다. “시중쉰은 군중이 배출한 영수”라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32세, 중앙 분국 서기중 최연소였다.

김명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