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중앙시평

결국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진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허태균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허태균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제자들에게 사주는 밥값을 아끼고 싶은 교수는 제자들에게 소심하게 이렇게 얘기한다고 한다. “뭐든지 먹고 싶은 대로 마음껏 다 시켜…나는 오늘 짜장면이 당기네. 아주머니, 나는 짜장면이요.” 물론 웃자는 얘기다.

임기제 검찰총장 사퇴 보면서 #검찰 독립 선언을 듣는 것은 #마치 식당에 들어선 교수가 #“나는 짜장면!”을 먼저 외치고 #“마음껏 시켜”라는 것과 닮았다

이 경우 비싼 메뉴를 마음껏 주문하는 정신 나간 제자는 아마 없을 거다. 학생들에게 전달되는 메시지는 ‘마음껏 시키라’는 말이 아니라 ‘나는 짜장면이요’라고 외치는 행동이다. 문재인 대통령 정부는 취임 이후 반복적으로 적법한 절차에 따른 합법적이고 탕평적 인사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그 선언적 말보다는 실제 어떤 인사 조치를 하는지, 그 행동이 바로 전체 공직사회에 전달되는 메시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새 정부의 행동은 어떠한가?

새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임기 7개월을 남겨둔 검찰총장은 사의를 표명했고, 청와대는 이를 수리했다. 임기가 남아 있는 각종 위원장들도 줄줄이 사의를 표명했다. 공정거래위원장은 2년9개월을 남겨두고 사임하고, 현 정권의 가치를 공유하는 인물로 교체됐다. 10개월의 임기가 남은 금융위원장, 1년7개월이 남은 권익위원장도 사의를 표명했다. 임기가 법으로 보장된 다른 위원장과 고위 공무원들에 대해서도 마치 사의를 표명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일부 정치인과 언론은 은근한 압박성 발언을 흘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임기는 법률로 보장되어 있다. 금고 이상의 형벌을 받거나 장기간의 심신 쇠약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만 면직하도록 사직의 이유도 명시되어 있다. 엄격하게 적용하자면, 합당한 근거 없이 사의를 표명하는 당사자나 그 사의를 받아들이는 새 정부도 모두 불법/편법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변명하려나? 스스로 나가겠다는데 어쩌냐고. 그렇게 치자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찍혀서 사직한 문화체육관광부 국장도 사표는 직접 썼을 테니 스스로 원해서 나갔다고 해야 하나? 본인이 사의만 표하면, 대통령은 말릴 수도 막을 수도 없어서 모두 자동으로 수리되는 걸까?

인사의 적법성은 최근의 검찰 인사 과정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현행법에 따르면 검사 인사는 검찰총장의 의견을 들어 법무부 장관이 제청해 대통령이 행하는데, 그 과정에 가장 핵심인 두 자리가 공석이니 그 인사가 제대로 이뤄졌는지에 대한 의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역할을 대신했다는 인물들도 검찰 인사 직후 사직해 버렸다. 그러니 모든 검찰 인사가 직무대행의 대행, 그의 대행이 동원될 판이고 도대체 누가 하고 있는지,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 정권은 헌법 정신을 훼손하고 실제 인사, 국정운영에서의 광범위한 법률 위반에 근거한 대통령 탄핵 때문에 이뤄진 조기 대선에 의해 탄생했다. 이 정권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바로 법을 초월한 제왕적 통치가 아닌 제도와 법률에 근거한 국정운영일 것이다. 그런데 정권교체기에 나타나는 이런 논란의 여지가 있는 초법적인 인사 조치는, 왜 모든 정권에서 반복되고 이번 정권에서도 일어나는 것일까?

어찌 보면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보편적 현상이라는 것이 심리학적 관점이다. 다양한 사회심리학적 연구에서 권력이 부여된 (심지어 무작위로 부여되어도)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더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는 행동을 하고 사회적 규범을 쉽게 위배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그 권력이 합법적으로 부여됐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더 쉽게 사회적 규범을 초월한 행동을 한다는 연구들도 보고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권력자 자신은 사회에 더 많은 기여를 했고, 그래서 그러한 초규범적 행동을 할 자격이 있다고 인식하게 되기에 일어난다는 설명이다.

새 정권의 모든 인사가 문제가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자신의 정치철학에 맞는 인사를 발탁하는 것은 인사권자의 당연한 권한이다. 그런 코드 인사가 바로 일관된 정책 구현의 바탕이 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법을 지키면서 수행돼야 한다. 아직 임기가 남아 있는 이들을 새 정권의 정치철학에 협조하도록 설득해야 하고, 그것도 국정운영 능력이다. 설사 설득이 어렵다면 때로는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 준법이다. 어차피 반대할 것도 별로 없는 사람들만 주변에 두고 마음껏 반대하라고 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이다.

임기제로 보장하려는 고위 공직의 소신은 선언적 말이 아니라 원래 반대할 사람들이라도 임기를 보장해 주는 행동에서만 확보된다.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보고 싶은가? 그럼 정권교체와 상관없는 검찰총장의 임기 준수가 우선이다. 다른 임기제 고위직도 마찬가지다. 새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검찰총장의 사퇴를 보면서 동시에 정권에 휘둘리지 않는 검찰을 만들자는 선언을 듣는 것은, 마치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짜장면!”을 먼저 외치고 “마음껏 시켜”라고 말하는 교수를 보는 듯 씁쓸하다.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