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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가 죽여야 하는 건 사람 아닌 이념과 헛된 이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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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이번이 첫 한국 방문이다. [사진 대산문화재단]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이번이 첫 한국 방문이다. [사진 대산문화재단]

“나는 전쟁의 공식 기록에는 관심 없다. 철저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정신성, 영혼에 대해 쓰려 했다.” “작업하면서 항상 최우선으로 삼는 한 가지 원칙은 진실을 전해야 한다는 거다.”

2015년 노벨문학상 알렉시예비치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차 방한 #“큰 고난 겪은 이들 목소리 모아 #인생의 진실만을 추리려 했다”

서울국제문학포럼(23~25일) 참석차 한국을 찾은 벨라루스 소설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69)의 메시지는 역시 묵직했다. 수백 명의 관련자 증언을 채록한 ‘목소리 소설’이라는 다큐 형식의 글로 전쟁, 원전사고 등의 참혹상을 고발해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다웠다. 지난 19일 기자회견에서 “증오는 누구도 구원할 수 없다”며 평화를 강조했고, “21세기가 죽여야 하는 건 사람들이 아니라 이념이나 인간의 헛된 이상”이라며 오욕의 인간 역사를 비판했다.

그의 노벨상 수상은 갈수록 위축되는 문학 현실, 진실과 조작의 경계가 흐려지는 ‘포스트 트루스(post- truth)’ 시대에 대한 경고다. 진중한 예술가의 풍모로 수백, 수천의 피해자 증언 가운데 진실을 가려야 했던 자기 작업의 어려움을 소개했다.

‘목소리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작업해왔다.
“나는 소박하고 작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과거 소련 공산주의 시절이 실제로 어땠는지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목소리 소설’이라는 장르를 개발했다. 작은 사람들은 국가의 이용 대상이었다. 국가가 그들을 죽였고, (그들로 하여금 타인들을) 죽이도록 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놀라울 정도인데,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
책 한 권에 수십 명의 목소리가 들어 있다.
“한 작품을 쓰는 데 5년에서 10년이 걸린다. 200명에서 500명까지 인터뷰한다. 내가 만난 사람들의 얘기가 전부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 기억의 한계 때문에 경험이 왜곡됐을 수도 있다. 또 사람에 따라 전쟁을 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다. 가령 2차 세계대전 참전 여성 중 비행기를 몰았던 여성이 기억하는 전쟁과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여성의 기억은 다르다. 세뇌된 이념도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누구나 각자의 퍼즐 조각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나는 사람들의 발언에서 이념을 걷어내고, 인생의 진실만을 추리려 했다. 같은 사람을 5~7번씩 인터뷰했다. 하지만 증언 내용 중 진실을 선별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직관적인 작업이다. 인생과 현실을 바라보는 내 주관적 시각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내면의 고백을 이끌어내는 노하우가 있나.
“특별한 비법은 없다. 사실 내 작업은 인터뷰라는 표현이 정확하지 않다. 사람들을 만나 그들 삶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지 반드시 전쟁이나, 체르노빌 얘기만 하지 않는다. 그냥 일상에 대해 대화한다. 그들이 갖고 있는 정보만 필요한 게 아니라 그들의 인간적인 모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노벨문학상뿐 아니라 유럽의 여러 문학상들을 받았는데, 나는 시상식에 대단한 문인 자격이 아닌 동시대인의 증인으로 참석하고 있다.”
수십 년 간 이같은 작업을 해온 동력은.
“작가가 다른 직업과 비교해 쉬운 건 아니지만 이보다 어려운 일도 많다. 가령 소아암 전문의는 작가보다 더 큰 고통을 겪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길을 포기 할 수 없었다.”
소설에서 여성 피해자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한국 여성들의 목소리도 점점 커지는데.
“한국은 아직 남성들의 나라인 것 같다. 어제 입국했지만, 제복을 입는 직종의 대부분이 남자였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는 여성 국방장관이 흔하다. 스웨덴에서는 군사 퍼레이드할 때 임신한 여성 군인도 나온다. 그런 모습은 한국이나 러시아에서는 아직 상상하기 이른 것 같다.”
한국에서는 3년 전 세월호 사건을 본격적으로 다룬 문학작품이 아직 없다.
“비극적인 주제를 다루기는 쉽지 않다. 사회학적인, 혹은 성직자 같은 신성한 접근방식을 동원해야 한다. 작가 스스로 철학자 같은 포지셔닝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뻔한 비극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말이다.”
당신 소설로 세상이 좀 더 살만해졌나.
“예술이나 문학이 일순간에 인간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는 건 나이브한 생각이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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