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시대 정신에 맞춰 검찰의 기수문화 타파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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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검찰의 ‘기수(期數)문화’는 강력하다. 군대·행정부·사법부·경찰 등 다른 공직사회에도 기수문화가 퍼져 있지만 검찰은 유별나다. 사법연수원 기수를 기준으로 보직과 직급이 정해지는 폐쇄적 서열문화의 근간이 되곤 한다. 기수 후배나 동기가 승진하면 ‘용퇴’라는 이름으로 줄줄이 조직을 떠나는 게 관행으로 굳어져 왔다.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의 발탁은 이런 기수문화를 깬 파격이라는 점에서 줄사퇴 관행이 또 재연될 조짐이다.

윤 지검장은 돈봉투 만찬 파문으로 좌천된 이영렬 전 지검장보다 다섯 기수가 낮은 23기다. 군에서 대령이 중장으로 벼락출세한 것에 비유된다. 그보다 선배와 동기들이 옷을 벗으리라는 전망이 나오는 까닭이다. 어제 문재인 대통령은 신임 법무부 차관에 이금로 인천지검장을, 대검 차장에 봉욱 서울동부지검장을 각각 임명했다. 윤 지검장보다 선배 기수의 두 사람을 기용함으로써 조직을 안정시키려 노력한 흔적을 읽을 수 있다.

현재 검찰에는 윤 지검장보다 선배가 4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권력의 입장에서 검찰 개혁을 위해 인적 청산은 필요하다. 그러나 옥석 구분이 없는 무더기 방출이 바람직할지는 짚어 봐야 한다. 사표를 고심하는 간부급 검사들은 20년 넘게 국민의 세금으로 키운 인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50대 초·중반인 이들이 쌓아 온 능력과 경험은 국가의 소중한 자산이다. 이들은 검찰을 떠나 변호사로 개업하면 그만이다. 조직을 위해 스스로 물러났다고 전관예우만 심화될 우려도 있다. 사회적 자산을 사장시키는 구태는 국가와 검찰, 개인 모두에게 득 될 게 없다.

능력 우선주의가 시대정신이다. 기업에서 동기나 후배 밑에서 함께 일하는 모습은 자연스러운 문화로 정착됐다. 능력 있는 검사라면 기수와 상관없이 검찰에 남아 국가를 위해 역량을 발휘하도록 선별하자. 전근대적 기수문화를 타파하고 조직의 틀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것이 검찰 개혁의 핵심이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