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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산불 나자 허둥지둥한 공무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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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방현 기자 중앙일보 내셔널부장
7일 오전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관음리 일대의 가옥이 산불에 타 무너졌다. 정학표(56)씨가 타다남은 식기들을 정리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7일 오전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관음리 일대의 가옥이 산불에 타 무너졌다. 정학표(56)씨가 타다남은 식기들을 정리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김방현내셔널부 기자

김방현내셔널부 기자

강원도 강릉 산불은 지난 7일 오후 9시를 전후해 되살아났다. 산림 당국이 완전 진화를 선언한 지 3시간 만이었다.

기자는 이날 오후 10시쯤 주민 대피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산림청 산불종합상황실과 강릉시 등에 전화를 걸었다. 산림청 관계자는 “대피명령을 내린 사실을 알지 못한다. 재발화한 불은 곧 진압될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지만 강릉시는 “산불이 재발화하자마자 주민 500여 명에게 대피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고 했다.

재난 발생 시 주민대피명령(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은 지자체가 내린다. 대피명령 내용을 산림청에 통보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이날 상황은 대책기관 간의 협조체계가 원만하지 않아 어수선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지난 6일 강원도 강릉·삼척과 경북 상주에서 대형 산불이 발생한 이후 관련 기관의 대응 과정은 허술한 장면의 연속이었다. 우선 국민안전처의 재난안전시스템이 침묵했다. 지난해 경주 지진에 이어 이번에도 재난문자 발송 등 경보를 울리지 못했다.

또 자치단체나 산림청·한국도로공사 등 다른 기관도 긴급재난문자 송출을 요청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마을 이장과 민방위경보시설 등을 통한 ‘구시대적’인 방식으로 대피가 이뤄졌다. 강릉 지역에는 연휴를 맞아 수많은 관광객이 있었지만 이들도 재난 정보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강원도 강릉 산불로 잿더미가 된 주택에서 주민들이 8일 쓸 만한 가재도구를 찾고 있다. [사진 강원일보]

강원도 강릉 산불로 잿더미가 된 주택에서 주민들이 8일 쓸 만한 가재도구를 찾고 있다. [사진 강원일보]

관련 기관들은 서로 책임을 떠넘겼다. 국민안전처는 “지자체나 산림청에서 재난문자 요청이 없었다”고 했고, 강릉시는 “재난문자는 공문으로 요청해야 하는데 상황을 파악하다 늦었다”고 해명했다. 국민안전처와 산림청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는 산불이 번지던 6일 화재를 알리는 글이 단 한 건도 올라오지 않았다.

산불은 4일째 진화가 안 되고 있다. 이 때문에 진화 작업마저 부실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소방헬기가 비상 착륙하는 과정에서 정비사 1명이 사망하는 안전사고까지 발생했다. 대선주자들은 지난 7일 산불 현장을 찾아 표를 얻기 위한 즉석 공약을 쏟아내기에 바빴다. “청와대가 국가 재난에 대한 강력한 컨트롤 타워가 되겠다(문재인)” “선진국 수준의 대응이 되도록 체계를 바로잡겠다(안철수)” 등이었다.

대통령 공석 사태가 5개월 이상 지속되는 데 황금 연휴까지 겹쳤다. 여기에 온 나라는 조기 대통령 선거에 휩싸여 있다. 사회 전체가 느슨해 보이는 때다. 이럴 때 큰 재난이 발생하자 국가관리시스템은 여지없이 허점을 보였다.

새로 뽑히는 대통령은 거창한 구호보다 국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내실 있고 꼼꼼한 안전 대책과 부처 간 긴밀한 협조체계를 최우선 과제로 추진했으면 한다.

김방현 내셔널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