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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 칼럼] 회계법인·신용평가사 신뢰 회복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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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강경훈동국대 경영학과 교수·한국금융연구센터 사무국장

강경훈동국대 경영학과 교수·한국금융연구센터 사무국장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 유적지에 가보면 성(城)이 많다. 외침에 대비하여 견고하게 지어져 있다. 과거에 성이 함락된 것은 성문이 뚫린 게 아니라 성안의 내통자나 첩자가 문을 열어준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성문을 지키며 왕래자들을 감독하는 문지기(gatekeeper)의 중요성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회계법인, 신용평가사나 증권 인수인 등은 현대 자본시장의 문지기다.

최근 한국에선 자본시장 문지기들이 본연의 역할에 실패한 사례가 여럿 있었다. 얼마 전 딜로이트안진 회계법인이 대우조선해양의 분식회계 문제로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신평사들도 동양그룹 계열사, LIG 건설 등의 부실 신용평가 스캔들을 경험했다. 증권을 인수하는 금융투자사들도 투자자들에게 발행기업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평가가 많다.

미국도 2000년대 초반 엔론, 월드콤 등의 부실 회계감사 사건을 겪었다.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으로 투자은행들이 대거 발행한 구조화채권과 이에 대한 부실 신용평가가 지적된 바도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실패 사례가 더 뼈아픈 것은 그 원인과 배경의 차이에 있다. 원래 미국 등의 투자은행, 신평사들은 자본시장의 발전 과정에서 높은 명성(reputation)을 쌓고 이를 통해 잘 알려지지 않은 기업의 유가증권이나 회계자료를 믿게 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이 맥락에서 자본시장 문지기는 ‘명성자본’의 임대업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2000년대 들어 이들이 스캔들을 자주 일으킨 것은 금융혁신, 경쟁 격화 등에 따라 명성을 유지하는 기회비용과 편익 간의 대소 관계가 역전된 데 비롯한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반면 국내 자본시장 문지기들은 충분한 명성을 축적하지 못한 것 자체가 문제라는 시각이다. 명성이 미흡한 문지기는 눈앞의 이익에 현혹되기 쉬운데 국내의 실패 사례는 이에 더 가깝다는 평가가 많다. 그럼 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우선 자본시장 문지기들에 대한 감독과 제재를 강화해서 부실 평가에 따른 예상 손실이 눈앞의 이익보다 충분히 크도록 해야 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자본시장 문지기들에 대한 감독 및 제재를 강화하는 추세다. 그런데 예상 손실은 결국 영업 정지나 퇴출 등으로부터 발생한다. 다시 말해 자본시장 문지기의 영업권이 가치가 있어야 감독, 제재 강화가 먹히게 된다. 일반적으로 영업권 가치(charter value)는 진입장벽에 의해 좌우된다.

정책당국은 자본시장 문지기의 영업권 가치를 유지해 주는 한편 건전한 경쟁을 촉진함으로써 이들이 명성을 쌓도록 유도해야 한다. 즉 자격 조건 등을 통해 저가 수주 경쟁이 판치지 못하게 하면서 품질 경쟁은 강화해야 한다. 또한 다양한 자본시장 문지기들 간 상호 견제가 이루어지는 것도 중요하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신평사, 회계법인, 증권인수 등 각 제도에 집중된 개혁 논의가 많았는데 보다 넓은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도 있다.

강경훈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한국금융연구센터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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