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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우울한 50세 생일, 과학계가 자초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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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최준호산업부 기자

최준호산업부 기자

생일은 누가 챙겨야 하나. 바삐 살다보니 생일이든 기념일이든 챙기기 어려운 게 요즘 세상이지만 그래도 안 챙기면 섭섭하기 마련이다. 생일을 맞은 사람에게도, 그 생일을 만들어준 부모에게도. 그래서 남이 못 챙기면 나라도 챙겨 먹어야 한다. 케이크를 자르고 촛불 끄는 걸 하지 못해 섭섭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1년에 한 번 돌아오는 그날이라면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고,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1일 오전 11시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과학·정보통신의 날 기념식’이 열렸다. 총리와 장관 등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는 유공자 훈·포장과 대통령 표창, 국무총리 표창 시상이 진행됐다.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인이 모여 상을 나누고 서로 격려했으니 기분 좋은 잔칫날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이날은 과학의 날 반세기, 5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지천명(知天命)의 생일날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성장이 멈춰버린 대한민국 국가 연구개발 혁신체계에 대한 반성과 함께 앞으로의 비전을 세우고 공유할 법도 했다. 하지만 이날 행사의 어느 구석에서도 ‘과학의 날 50주년’이란 표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과학 원로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대통령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도 관심이 없었다. 주최 측에 따르면 초청은 했지만 응한 후보들이 없었다.

[일러스트=박용석]

[일러스트=박용석]

과학의 날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만들어졌다. 1967년 4월 21일 과학기술처 발족일을 기념해 이듬해 4월 21일을 과학의 날로 정했다. 이후 과학은 한국의 성장엔진이 돼 이 땅의 근대화·산업화를 앞장서 이끌어 왔다. 그런 과학의 날이 왜 50주년을 맞아 실종됐을까. 4월 21일이 과학의 날이 아니라 과학·정보통신의 날이 된 때문이다. 2013년 과학과 정보통신이 만난 미래창조과학부가 만들어지면서 한 부처에서 과학의 날(4월 21일)과 정보통신의 날(4월 22일) 행사를 하루 걸러 하기가 부담스러워졌다. 대통령이 한 부처 행사에 연이틀 가야 하는 것도 부담이었다. 그러다 보니 올해 50주년 생일이 묻혀버린 것이다.

하지만 진짜 원인은 나이 쉰이 되도록 생일상을 받기만 해 온 철없는 ‘과학’에 있는 것 같다. 그 나이 되도록 미역국을 입에 떠 넣어준 부모(국가) 탓도 크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박사 위에 주사(6급 공무원)’란 자조 섞인 한탄이 나오는 관치(官治) 과학계의 현실이 낳은 폐해다. 반세기 전 과학의 날을 제정하고 대덕연구단지를 만든 대통령 딸은 지금 ‘감옥’에 있다. 과학계는 이제 부모가 챙겨주지 못하면 생일 자축도 못하는 애어른이 돼버렸다. 이래저래 우울하고 쓸쓸한 과학의 날 50주년이다.

최준호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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