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번 주사 맞고 우승메달 거머쥔 박정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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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아 IBK기업은행 배구선수.

박정아 IBK기업은행 배구선수.

"아~ 정말 이번 시즌은 길었어요."

지난 3일 용인 IBK기업은행 배구단 숙소에서 만난 박정아(24)의 표정은 시쳇말로 '피곤에 쩔어' 있었다. 그럴 법도 했다. 박정아는 지난해 3월 챔피언결정전이 끝난 뒤 한 달도 채 쉬지 못하고 대표팀에 소집됐다. 리우 올림픽 예선을 위해서였다. 예선이 끝나고 올림픽에 다녀온 뒤에는 KOVO컵 대회를 치렀고, 곧바로 시즌이 개막됐다. 11개월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한 그는 포스트시즌에선 13일 동안 무려 7경기를 치렀다. 체력이 바닥나는 바람에 나중에는 하루에 한 번씩 수액주사를 맞으며 버텼다. 3차전이 끝난 뒤에는 어지럼증을 느껴 곧바로 숙소로 향했다.

김희진-박정아-김사니. [사진 IBK기업은행 배구단]

김희진-박정아-김사니. [사진 IBK기업은행 배구단]

고생 끝에 낙은 있었다. IBK기업은행은 챔프전에서 정규시즌 우승팀 흥국생명을 3승1패로 물리쳐 세 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2011년 창단 멤버로 입단한 박정아도 세 번째 우승 메달을 목에 걸었다. 박정아는 세 번의 우승 중 "이번이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 했다. "만약 챔프전에서 5차전까지 갔다면 졌을지도 몰라요. 아니, 4차전에서도 4세트 졌다면 우승 못 했을 거에요. 사람들이 우리더러 좀비라고 하더라구요? 호호호."

시즌이 시작되기 전부터 박정아는 지쳐 있었다. 리우올림픽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 때문이었다. 리우올림픽 8강 네덜란드전에서 대표팀이 진 뒤 박정아는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소셜미디어 계정에 악성댓글이 달리는 바람에 비공개로 전환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정철 대표팀 감독이 소속팀 선수인 박정아를 편애한다"는 비방에 박정아가 23실점(실제로는 범실 11개)을 했다는 근거없는 지적도 나왔다. 예선에서 김연경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공격을 맡았던 활약도 잊혀졌다.

박정아 선수가 6일 오전(현지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마라카나징유 배구 경기장에서 진행된 2016 리우올림픽 여자배구 조별예선 1차전 대한민국-일본의 경기에서 득점 후 동료들과 환호하고 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박정아 선수가 6일 오전(현지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마라카나징유 배구 경기장에서 진행된 2016 리우올림픽 여자배구 조별예선 1차전 대한민국-일본의 경기에서 득점 후 동료들과 환호하고 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박정아만의 잘못도 아니었다. 박정아는 소속팀 기업은행에선 서브 리시브를 거의 하지 않고 공격에만 전념한다. 외국인선수 리쉘이 리시브를 책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표팀에선 리시브에도 참여해야 했다. 리시브 연습에 비중을 맞췄지만 쉽진 않았다. 박정아는 "평소에 잘 울지 않는데… 이번엔 좀 울었어요. 제가 평소 맡지 않는 포지션이라 해도 대표팀에선 잘 해야하잖아요. 주변 사람들에게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어요. 그래도 잘 이겨낸 거 같아서 제가 기특해요"라고 웃었다. 박정아는 컵대회에선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MVP를 받았다고, V리그에선 국내 선수 중 공격성공률 1위, 득점 2위에 올랐다. 박정아에게 자신의 점수를 매겨달라고 하자 "60점? 기복이 심했으니까요"라고 냉정한 평가를 했다.

IBK기업은행의 우승이 특별한 건 현재의 멤버로 맞이하는 마지막 시즌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팀을 이끌어온 박정아와 김희진은 나란히 FA 자격을 얻었다. 박정아는 "아직까지 생각해보진 못했는데 주변에서 '마지막이 아니겠느냐'는 말을 하니 '그럴수도 있겠다' 싶더라구요. 장난기 많은 희진 언니가 주장이 된 뒤 걱정했는데 정말 노력을 많이 하더라구요. 저는 그렇게 못 할 거에요. 이 말 하면 언니한테 혼나려나…"라며 웃었다. 올해 연봉 2억2000만원을 받은 박정아의 몸값도 뛸 전망이다. 그는 FA는 아직 생각 안 해봤어요. 천천히 고민해보려고 해요"라고 말했다.

우승 메달을 들고 있는 박정아

우승 메달을 들고 있는 박정아

박정아가 FA보다 더 고민하고 있는 건 '재충전'이다. 평소 연습을 많이 시키기로 유명한 이정철 기업은행 감독이 이번엔 한달 가까운 휴가를 선수들에게 줬기 때문이다. 박정아는 "구단에서 우승 보너스로 약속한 여행 말고도 계획을 3개나 잡았어요. 그 중 하나는 엄마랑 갈 거에요. 집이 부산이라 자주 못 가는데 엄마랑 1년에 한 번은 꼭 여행을 가기로 약속했거든요"라고 말했다.

꼭 가고 싶은 곳도 있다. 바로 피아노학원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배구에 몰두했던 그가 처음으로 가진 취미다. "전력분석원님이 너무 배구에만 빠져 있지 말라고 하셔서 피아노를 배우러 갔어요. 전공하는 학생들처럼 배운 건 아니고, 쉬운 연주곡들을 칠 수 있어요. 피아노도 사서 가끔 숙소에서 치는데 너무 재밌어요. 시즌 중엔 학원에 거의 못 갔는데 이젠 가야죠."

박정아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들을 따라 배구를 시작했다. 처음엔 '피구가 배구인 줄 알았다'던 그는 어느새 TV에서만 보던 김연경, 김사니와 함께 코트에서 뛰는 선수가 됐다. 프로 입단 당시 10년 뛰는 걸 목표로 세웠던 그는 이제 더 먼 곳까지 바라보고 있다. "제가 요즘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한)유미(현대건설) 언니에요. 승부욕 넘치는 플레이를 보면 참 대단해요. 저는 안 그렇거든요. 저랑 띠동갑인데 열정 넘치는 플레이를 배우고 싶어요. 저도 그만큼 오래 할 수 있겠죠?"

용인=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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