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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30X호 원룸은 '지옥'이었다...10년 지기 반라 변사체 만든 이유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3월 26일 오전 7시56분 경기도 시흥의 한 유흥가. 4층짜리 상가건물 3층 원룸에서 “이웃집에 불이 난 것 같다. 연기가 난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출동한 소방대원이 강제로 30X 호 원룸 문을 열자 40여㎡의 좁은 방에서 속옷을 입지 않은 반라(半裸)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주위에는 출혈 흔적이 많았다.

살해 후 속옷까지 벗겨 강도-성폭행으로 위장한 듯 #증거 없애려 범행현장 다시 찾아 변사체에 불 질러 #"우발범행" 주장하지만 경찰은 돈 노린 범행 추정 #피의자 채무액 상당한데다 피해자 명의로 대출받아

누군가 변사자가 입고 있던 상의에 불을 질렀는데 방안으로 옮겨붙지는 않고 꺼졌다. 얼굴과 지문 등이 일부 불에 탔고, 벽면은 검게 그을렸다. 벗겨진 속옷과 바지는 옷 정리함에 들어 있었다.
경찰의 ‘시흥 반라 여성 살인사건’ 수사가 시작됐다. 변사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불이 난 원룸의 거주자는 A씨(38)였다. 경찰은 A씨에게 연락이 닿지 않는 데다 불에 타지 않고 남아 있는 지문과의 대조작업을 통해 ‘변사자=거주자A씨’로 판단했다. 30X 호 바로 앞 복도 천장에는 폐쇄회로TV(CCTV)가 달려있었지만 모형이었다.

경찰은 A씨의 지인과 유족, 이웃 주민 등을 상대로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서울과학수사연구소에 부검도 의뢰했다. A씨 발견 다음 날 이뤄진 부검결과를 보니 “예리한 흉기에 의해 목과 복부에 치명상을 입고 과다출혈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소견이 나왔다. 기도와 기관지 안에 그을음이 없었다. 숨진 이후 불을 질렀다는 의미다.

시흥 반라여성 살인사건 범행현장에서 바라본 복도. 김민욱기자

시흥 반라여성 살인사건 범행현장에서 바라본 복도. 김민욱기자

탐문수사를 벌이던 경찰은 A씨의 한 지인으로부터 용의자를 좁힐 만한 중요한 진술을 확보했다. A씨가 숨지기 전 목욕탕에서 만난 지인 B씨다. B씨는 “A씨가 '(누군가에게) 300만원을 빌려줬는데 갚지 않아 화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경찰에 말했다. 당시 A씨는 이 채무자를 욕할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고 B씨가 전했다. “(A씨와 채무자) 둘이 만나기로 한 것으로 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덧붙였다.

경찰은 사건 현장 주변에 설치된 CCTV와 A씨의 전화통화 내역분석을 토대로 A씨의 동갑내기 친구인 이모(38·여)씨를 용의자로 특정했다. 결정적으로 이씨는 A씨 명의로 제2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으려다 실패한 인물이기도 했다. 경찰은 A씨 발견 하루만인 27일 오후 8시46분 서울 서대문에서 이씨를 긴급체포했다.

A씨와 이씨는 10년전 사회생활을 하면서 서로 알게 됐다. 한 달에 한 번 이상 연락하고 만날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씨는 10년 지기인 A씨를 살해하고 시신에 불까지 낸 혐의를 받는 피의자가 됐다.

이씨는 경찰 초기 조사 때 “내가 200만원(이씨 주장 금액)을 갚지 않자 (A씨가) 나를 무시해 화가 나서 그랬다”며 우발적 범행이었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경찰에 따르면 수억원의 빚에 시달리던 이씨가 처음부터 A씨의 돈을 노리고 계획범죄를 저질렀다고 한다. 이씨는 경찰에서 정확한 빚 규모를 진술하지는 않았다.

A씨가 숨진 채 발견되기 일주일 전인 지난달 19일 이씨는 A씨의 시흥 원룸에서 A씨와 함께 술을 마셨다. 다음날 새벽 채무문제로 둘은 심한 다툼을 벌였다고 한다. A씨를 넘어뜨린 이씨는 등 위로 올라가 종이상자 포장용 테이프로 A씨의 손을 묶고 입을 막았다. 손에는 흉기가 들려 있었다.

10년 친구는 순식간에 무섭게 돌변했다. 이씨는 예리한 흉기로 A씨의 온 몸을 찌르며 신용카드 비밀번호 등 개인정보를 알아냈다. 스마트폰 화면 잠금 비밀번호까지 이런 방식으로 알아낸 것으로 경찰수사에서 드러났다.

이씨가 휘두른 흉기로 인해 A씨의 몸에 난 상처는 무려 40여 군데였다. 사망에 이르게 한 치명상을 빼더라도 단지 A씨의 개인정보를 빼내기 위해 흉기를 사용한 흔적도 수십 곳이나 되는 것으로 경찰은 파악했다. A씨에게 지난달 20일 30X호 원룸은 말그대로 '지옥'이었다. 이씨는 “화가 나 찌르기도 했고, (신용카드) 비밀번호를 알아내려 찌르기도 했다”고 진술했다.

범행현장을 빠져 나가는 피의자 모습. [사진 경기 시흥경찰서]

범행현장을 빠져 나가는 피의자 모습. [사진 경기 시흥경찰서]

이씨는 이같은 방법으로 알아낸 개인정보로 A씨가 발급한 신용카드 업체로부터 1000만원의 카드론 대출을 받았다. 긴급체포 당시 600여만원 가량을 썼는데 여기저기 빌린 채무를 갚는데 대부분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씨는 지난달 26일 오전 3시40분쯤 A씨가 쓰러져 있는 A씨의 원룸을 다시 찾아가 증거인멸 목적으로 사체에 불을 질렀다고 경찰이 전했다. 살해 당시 알아낸 원룸 현관 비밀번호를 이용해 자기집처럼 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고 한다.

이씨는 26일 새벽 경찰 수사를 따돌리기 위해 A씨 원룸에서 직선거리로 1.4㎞가량 떨어진 곳에서 흰색 외투를 벗고 회색 외투로 갈아 입는다. 가까운 거리지만 택시로 다시 범행장소로 이동한다. 방화 후 서울 집으로 왔을 때는 또 검은색 차림이었다. 노출을 피하기 위해 나름 머리를 썼지만 이런 장면들은 CCTV에 고스란히 담겼다.

특히 이씨는 알리바이(현장 부재증명)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휴대전화를 남자 지인 C씨(48)에게 맡겨 C씨가 전화를 사용하도록 했다. 만일에 있을 경찰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한 주도면밀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살인사건 전날인 19일에도 갈아 입을 옷을 싸왔다. “친구 집에서 하룻 밤 자서 갈아 입을 옷을 싸왔다”고 주장했지만 경찰은 신빙성을 낮게 보고 있다. 사건을 수사한 경기 시흥경찰서는 강도살인 및 사체훼손, 현주건조물방화 등 혐의로 구속한 이씨를 지난 5일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경찰 관계자는 “처음에는 강도, 성폭행 사건으로 위장하려 하의를 모두 벗긴 것으로 보인다. 범행동기에 대해 여전히 우발적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돈을 노린 계획적인 범죄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한편 경기남부지방경찰청(청장 김양제)은 이번 사건을 수사한 강력팀 여인갑 경사를 1계급 특진(경위)했다. 또 한광규 형사과장 등 직원 5명에게 경찰청장 표창장을 수여했다.

시흥=김민욱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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