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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서 온 편지|미국이 비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근래 미언론을 지켜보고있으면 마치 미국이 금새 무너져내릴 것같은 느낌마저든 다. 신문·방송은 매일 요란하게 미국이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비단 최근 증시파동을 계기로 한 경제적 위기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지난 초여름 미국은 도덕·윤리의 붕괴를 놓고 한창 시끄러웠다. 의회의 이란-콘트라청문회가 백악관참모등을 출석시켜 대통령의 대이란 무기밀매 지시여부등 집요하게 추궁했지만 백악관은 추호의 책임도 없다고 잡아뗐다. 대통령후보경쟁에서 야당 선두주자로 달리던 정치인이 미녀 모델과 놀아난 일로 물러났고, 그는 이를 폭로한 신문을 비난해 눈길을 끌었다. 전도가 양양한 또다른 야당후보는 남의 연설을 모방하고 대학시절에 남의 글을 표절했다는 부정직한 행동으로 탈락했다.
정치판만 그런게 아니었다. 증권회사 간부가 고객이 맡긴 돈을 굴러 사복을 채운 사건이 지면을 장식했다. 심지어 전국 텔리비전방송을 통해 성경복음을 전도해온 고명한 목사의 염문이 터져나왔다. 당사자는 라이벌 목사의 음모라고 발버둥쳤다. 모스크바주재 대사관을 지키던 군인은 미인계에 말러들어 소련 스파이를 끌어들였다.
물질문명을 추구해 오는 과정에서 미국의 정신건강에 깊은 병이 생긴 게 아니냐는 반성의 소리가 높아졌다. 미국사회에서 도덕과 윤리의 타락이 어제오늘만의 현상이 아니라 하더라도 국가를 지탱하는 지도층마저 가치관외 진공상태가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자성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제기됐다. 언론은 심지어 미국민성에 커다란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는 진단마저 내리려 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들의 논리대로 하자면, 도덕과 윤리의 타락위에 이루어진 물질적 부유와 경제 번영 그 자체가 밑바닥에서부터 흔들리는 것같은 사태가 터진 것이다. 지난달 19일 주가폭락은 30년대 경제공황을 예고한 29년 증시붕괴때의 주가 하락 폭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제임즈·레스턴」씨는 최근 뉴욕 타임즈지에 쓴 글을 통해 『파티는 끝났다』고 미국민들에게 경고했다. 그는 그동안의 낭비와 무분별을 지적했다. 그는 『향연은 끝나고 청구서가 날아들고 있다』고 말했다.
타임지는 미국이 도피주의적 환상에 빠져있었고, 저축없이 낭비만 했으며, 국제현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개탄했다. 실세로 가진게 없으면서 크레디트 카드로 살아오는 동안 일본등 외국 투자가들이 착착 미국재산을 사들였다고 일깨웠다. 『우리는 이제 더이상 예전의 우리가 아니며 「미국의 세기」는 지나갔다』고까지 선언했다. 미국의 한 지식인은 로마제국이나 한나라의 지배가 얼마나 계속됐느냐면서 이 언론인의 경고대로라면 미국의 영광은 너무 짧은게 아니냐고 반농조의 낭패감을 표시했다.
「미국의 세기」 종말 여부는 제쳐두더라도 미국의 위기는 증시파동이 아니었더라도 여러 구석에서 지적돼 왔다. 재정적자가 해마다 1천5백억∼2천여억 달러에 이르고 무역적자도 1천5백억달러수준의 규모다. 이 정도의 무역적자는 웬만한 실력을 갖춘 나라의 전체 무역거래액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외채도 2조달러를 넘어 세계최대 채무국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행세 깨나 하는 사람이 권위를 찾으려면 유럽 승용차를 타야 하고, 고장 적고 값이 싼 차를 타려는 중산층은 일제 (요새는 한국산도 포함됐지만)소형차를 사야하는 형편이다. 자동차 정비공도 말썽없는 차를 타려면 미국차를 피하라고 충고하는 판이다.
미 언론이 더욱 심각히 우려하는 점은 국가가 이같은 위기를 맞았을때 국민들을 확고히 이끌고 나갈 지도력이 현재 미국에 결여돼 있다는 것이다.
주가가 하루만에 5백8포인트의 기록적인 폭락사태를 빚었을때 「레이건」대통령은 투기꾼 때문이라고 간단히 말했다. 이튿날은 민주당 때문이라고 했다.
그 다음날 증시가 진정 기미를 보이자 『사태가 끝난것같다』고 그는 기버했지만 다시 시장이 곤두박질하게 돼서야 야당측과 수습안 협상에 들어갔다.
미언론은 이같은 통합적인 위기현상과, 그리고 이에 직면하여 우왕좌왕하며 상호 책임을 전가하려는 지도층의 모습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고 있다.
만약 이같은 사태가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발생했다면 사회가 벌써 심각한 혼란에 빠졌을것 같은 생각이다.
심지어 사회가 안정된 서구 어느 곳이었더라도 벌써 정권이 흔들렸을 것이다.
물론 미국도 이처럼 정치·경제·도덕등의 동요에 따라 전반적으로 국민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있음은 사실이다. 이미 가계지출등 소비가 위축되고 있다는 통계가 나오고 있다. 특히 대통령을 비롯한 행정부·의회등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 현상이 심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한구석 국가 기능이 마비되는등의 결정적 붕괴현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고 위기의식이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용량이 큰 나라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충격이 오면 온통 나라 전체가 비등점 이상으로 팔팔 끓어올라 최루탄과 화염병이 수시로 난비, 국민이 질식 직전의 긴장상태에 계속 좇기는 우리의 각박한 현실과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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