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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했던 영어에 다시 도전하면 짝사랑 만난 두근거림 느껴지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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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호 24면

업무상 영어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 늘 영어를 잘 하고 싶다. 미국인 친구 하나 없으면서 새해가 되면 ‘영어 공부’를 다이어리에 적어 넣는다. 지긋지긋한 인생의 숙적이라 생각했는데 그는 “첫사랑”이란다. 올해 1월 출간돼 2달 여 만에 29쇄를 찍은 베스트셀러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의 저자 김민식(49) MBC PD. “많은 사람들에게 영어는 중·고등학교 때 짝사랑했던 상대와 비슷한 것 같아요. 포기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다시 소식을 듣게 된 거에요. 한번 연락해볼까, 이번엔 꼭 잘 해보고 싶은데.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거죠.”

베스트셀러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 쓴 김민식 PD

이런 두근거림을 느낀 3040 직장인들이 이 책의 주요 독자다. 김 PD의 블로그에는 “이 책을 읽고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는 ‘간증’이 줄을 잇는다. 신기한 건, 이 책을 쓴 이가 영어학원 강사도, 언어 전문가도 아닌 시트콤·드라마 PD라는 것. 1996년 MBC에 입사해 ‘뉴 논스톱’ ‘내조의 여왕’ 등 여러 화제작을 만들었던 김 PD는 한국외대 통역대학원 출신이다. 유학은 커녕 어학 연수, 회화 학원 한번 다니지 않고 혼자 좌충우돌하며 영어를 마스터한 자칭타칭 ‘독학의 신’이다.

난데없이 영어책이라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2012년 MBC 노조 파업 이후, 회사에서 드라마 연출을 시켜주지 않더라. 지금도 편성본부 TV송출실에서 근무한다. 처음엔 엄청난 분노와 좌절감에 휩싸였는 데, 타고난 게 ‘딴따라’라 그런지 드라마나 시트콤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에게 즐거운 이야기를 좀 들려주고 싶었다. 내가 가진 콘텐트 중에서 도움이 되고 재밌는 이야기가 뭘까 생각하니 영어 공부였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불로그에 올리기 시작한 게 책까지 이어지게 됐다.”
공대를 졸업하고 통역대학원을 나와 방송 PD가 된 독특한 이력인데.
“한양대 자원공학과를 다녔는데 적성에 맞지 않아 방황을 많이 했다. 방위병으로 근무할 때, ‘태어나서 연애 한번 못해보고 전공 학점도 바닥에, 하고싶은 일도 잘하는 일도 없는 나는 대체 뭔가’ 싶었다. 남보다 나은 특기를 하나쯤 만들어보자 하는 생각에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간절함이 있어 그랬는지 실력이 쑥쑥 늘더라.”
그때부터 영어책을 외우는 방식으로 공부했나?

“중학교 때도 영어 교과서를 외워서 효과를 봤다. 내가 외우라고 권하는 책은 읽기에도 버거운 어려운 원서가 아니다. 그동안 시작했다가 포기하고 말았던 기초 영어회화책 한 권, 그걸 하루에 몇 문장씩 외워보라는 거다. 기초 회화책 한 권을 통째로 외우고 나면 일상적인 회화가 술술 나오는 게 느껴질 거다. 그렇게 말문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는 사실 영어 학습서라기보다 친한 선배와 나누는 세상 이야기같다. 자신이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하면서 겪은 재밌는 에피소드는 물론, “잘 외워지지 않는다고 너무 자책하지는 마세요”처럼 등을 툭툭 두드려주는 위로까지 담아 읽다보면 웃음이 쿡쿡 터진다. 김 PD는 “‘영어로 내 인생을 바꾸고야 말겠어’ 이런 결심을 하라는 게 아니라, 힘겨운 인생을 밝히는 작은 성취감을 영어에서 맛보자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영어 사교육으로 고민하는 학부모들에게 “아이들에게 너무 죄의식을 가지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영어 공부가 삶의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통역대학원에 들어가기 전, 치과에 의료기기를 파는 영업 사원으로 일했다. 영업을 하다보면 정말 모욕을 많이 당한다. 퇴근 후에도 안좋은 기분이 계속되길래 일부러 통역대학원 입시학원에 등록을 했다. CNN을 5분간 듣고 그대로 통역을 하는 수업이라, 완전히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됐다. 나에게는 그 시간이 치유였고, 인생의 새로운 문을 열어줬다.”  
이 책을 읽고 위로 받았다는 학부모들도 많다.

“한국의 영어 사교육에는 할 말이 많다. 예를 들어 방학때 아이들 해외 영어캠프에 한번 보내면 400~500만원이 든다. 갔다온 직후엔 애들이 영어를 줄곧 하지만 곧 잊어버린다. 그러면 다음 방학에 또 보내고, 그러다 유학 비용까지 대야 한다. 형편이 되면 보내도 좋다. 하지만 그렇게 못했다고 ‘내가 아이들의 앞길을 막았구나’ 미안해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영어는 성인이 되어서도 충분히 할 수 있고,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그럼 아이들에게도 영어책 한 권을 외우게 하면 되는 건가.
“무턱대고 시키지 말고 아빠엄마가 아이들과 함께 외우면 더 좋을 것 같다. 아이가 방과 후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다면 그 교재를 함께 외워라. 아이들에게 영어를 놀이처럼 즐기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영어책 한 권을 다 외웠다면, 그 다음엔 무엇을 해야 할까. 김 PD는 “일단 첫 단계를 마치고 자신감을 갖게 되면, 하고싶은 게 생길 것”이라며 “영어 소설을 읽거나 좋아하는 드라마 스크립트를 찾아 외우거나 여행을 떠나거나, 영어가 인생의 다채로운 경험과 맞물려 더 많은 즐거움을 만들어내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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