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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도 노벨문학상 노린 작품이라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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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호 29면

지난달 일본에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ㆍ68)의 신작 장편소설 『기사단장 죽이기(騎士團長殺し)』를 읽기 시작했다. 1·2권 합쳐 1000쪽이 훌쩍 넘는 분량, 아직 갈 길이 멀다. 첫 문장을 읽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오늘 짧은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얼굴 없는 남자’가 내 앞에 있었다.”

신작 장편소설 낸 #무라카미 하루키

너무 하루키스럽지 않은가. 현실과 이(異)세계가 느닷없이 교차하는, 하여 이게 뭔가 싶으면서 빨려들어가는, ‘자 하루키의 세상으로 어서 들어오세요’ 라는 특유의 외침 말이다.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 ‘나’는 36세로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다. 아내와 헤어지고, 지금은 치매로 요양원에 들어가 있는 한 노 화가의 저택을 빌려 혼자 살고 있다. 어느날 다락방에서 ‘기사단장 죽이기(騎士團長殺し)’라는 제목의 그림을 발견한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지오반니’를 소재로 젊은이들이 ‘기사단장’을 죽이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그 사이 주인공은 한 자산가에게 초상화 제작을 의뢰받고, 그림을 가르치는 소녀 제자 등과 교류하며 이 그림에 감춰진 수수께끼를 탐구한다.

소설은 일본에서 나오자마자 초판 130만부를 찍으며 화제를 모았다. “하루키가 그간의 작품에서 보여준 다양한 세계를 집대성한 걸작”이며 “이 작품으로 노벨상에 한 걸음 다가섰다”는 평가도 나온다. 작품 속에서 살짝 언급된 난징대학살 관련 내용 때문에 논란에도 휩싸였다. 소설속 등장인물 하나는 주인공에게 1937년 일본이 중국 난징을 점령했을 때 벌인 참살에 대해 언급하며 “일본군이 항복한 병사와 시민 10만~40만명을 죽였다”고 말한다. 이 구절과 관련, 소셜미디어네트워크(SNS) 등에는 “40만명이라니 중국의 주장보다 10만명이 많다”, “그렇게까지 노벨상을 타고 싶은 것인가” 등 하루키를 비난하는 내용이 속속 올라온다.

하루키의 소설을 대부분 읽긴 했지만, 팬이라고 할만한 수준은 아니다(소설보단 에세이를 좋아한다).『노르웨이의 숲』이나 『해변의 카프카』, 최근작 중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등은 재밌게 읽었지만, 그 외 많은 작품은 ‘뭔가 멋진 이야기인 것 같은데, 일단 내용파악이 안 되네’라며 씁쓸한 마음으로 덮었다. 왜 그랬던 것인지, 최근 출간된 일본 문예비평가 사이토 미나코의 『문단 아이돌론』을 읽다가 깨달았다. 그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은 사실 게임소프트웨어 그 자체”라고 말한다. 일종의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롤플레잉 게임같은 텍스트로 “너희가 그렇게나 게임을 원하니 평생 풀고도 남을 만큼 수수께끼를 던져주겠다”는 것이 하루키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그렇군. 수수께끼에 취약, 게임에 젬병인 나같은 독자에게 하루키의 퍼즐을 푸는 것은 너무 고난도 작업이었던 것이다.

최근 나온『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오후』는 바로 이런 수수께기 풀기에 빠진 비평가들이 쓴 책이다. 이 책에선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클래식과 재즈 음악, 음식과 색깔에 대한 분석은 물론 작품속 ‘4’라는 숫자의 의미, ‘8월 15일’은 몇번이나 등장하는가 등을 다룬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또 의심한다. ‘정말 하루키가 이런 걸 다 계산하고 소설을 쓴 게 맞을까.’

내년도 노벨상이 정말 하루키에게 돌아갈 지 누가 알겠나. 하지만 노벨상과 상관없이 신작 출간 소식이 한국은 물론 미국과 유럽에서까지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걸 보면 그가 지금 세계에서 가장 핫한 작가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 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오후』 저자들은 그의 소설이 “세계에 공통된 기반인 신화를 의식한 이야기, 알지 못하는 이계(異系)와 관계성을 여는 폭넓은 언어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시대의 독자들을 매혹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퍼즐에 약한 나 같은 독자는 신작을 겨우 5분의 1쯤 읽은 지점에서 벌써 겁에 질렸다. 첫 문장 ‘얼굴 없는 남자’의 정체를 책을 덮을 때까지 도무지 알아챌 수 없을 것 같아서다.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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